경남 남해 멸치, 단순한 젓갈이 아닌 바다 문화의 핵심
남해 멸치, 조선의 세금이자 민속의 기록이 되다
경상남도 남해는 오늘날에도 ‘멸치의 고장’으로 불리지만, 멸치가 진정으로 특별한 이유는 그 조그마한 생선에 국가, 민속, 제례, 바다 공동체의 수백 년 역사가 함께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남해 멸치는 단순히 반찬거리가 아닌, 조선 시대 국가 운영의 경제 체계와 식문화 전통의 실체를 구성했던 핵심 수산 자원이었다. 실제로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속찬지리지』 등 여러 관찬지리지에는 남해를 포함한 경남 해역에서 연중 대량의 멸치가 어획되고, 그것이 ‘어염세(魚鹽稅)’ 형태로 궁중과 관청에 납부되었다는 기록이 일관되게 나타난다.
멸치는 물고기 중에서도 특별히 염장이나 젓갈로 가공이 가능해 유통 범위가 넓고 저장성이 뛰어난 해산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세곡(稅穀) 부족 지역에서 국세 대체품으로 선택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이 농본주의적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바다에 기대는 지방의 현실을 반영해 수산물로 세금을 거두는 유연한 조세 운영을 채택했음을 의미한다.
남해 멸치는 그렇게 작은 은빛 생선에서 시작해 국가의 경제, 마을 공동체의 노동, 제례의 식탁까지 거대한 구조 속에 스며든 바다의 기록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 역사적 궤적을 고려~조선 시대 문헌과 제도, 그리고 민속 문화에 바탕을 두고 풀어본다.
조선의 어세 체계와 멸치: 기록으로 남은 실질 조세자산
멸치는 조선시대 어염세(魚鹽稅)의 핵심 품목이었다. 농작물 중심의 조세 체계 안에서도 해안 지역의 현실을 반영해 어업·소금으로 세금을 대체하는 방식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었고, 멸치는 그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인 어종으로 분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는 경상도 남해군 항목에서 “멸치가 다량으로 나며, 그것을 염장해 젓갈로 하여 관가에 납부함이 백성의 큰 소득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곧 멸치가 국가의 세입 자산으로도 사용되었고, 백성의 생계 작물로도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동국여지승람』(15세기)과 『경상도속찬지리지』(16세기)에서도 남해군과 인근 지역의 멸치젓이 수도 한성까지 유통되었으며, 품질 면에서도 타 지역보다 우수하여 왕실에 납품되었다는 내용이 명확히 드러난다. 특히 『경국대전』에서 명시한 지방공물 가운데, 경상도 지역의 어염공물 항목에 멸치젓과 염장멸치가 별도 품목으로 분류된 것은, 멸치가 단지 민간 식재료가 아닌 '국가 관리 대상' 수산물이었음을 뜻한다. 이는 남해 멸치가 단순히 많아서가 아니라, 보관성, 상품성, 공물용 표준화에 모두 부합했던 역사적 특산물이었음을 보여주는 핵심 근거다.
염장 기술과 젓갈의 정착: 멸치가 ‘문화’가 되기까지
멸치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염장과 발효를 통한 저장 문화의 발전이다. 남해 지역은 염전이 발달하고 해풍이 강한 해양성 기후로, 젓갈 발효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바다 환경을 품고 있었다.
조선 후기 문헌인 『산림경제』에서는 “멸치는 비린내가 덜하고 염이 들면 향이 깊어 오래 둘수록 국물이 맑아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남해산 멸치가 염장 젓갈로서도 높은 품질을 가졌다는 전통 인식을 의미한다. 남해의 멸치젓은 민속에서 장독대의 윗자리를 차지할 정도로 귀한 반찬이었으며,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서도 “맑은 물에 생멸치를 씻어 곧바로 염장해, 뚜껑을 덮고 땅속에 묻으면 열흘 후 국물이 빛을 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전통 제조방식은 20세기 중반까지 마을 단위로 계승되었고, 각 마을마다 젓갈 항아리를 묻는 ‘젓갈 터’가 형성되며 공동 소유지처럼 인식되었다. 또한 멸치젓은 제례음식으로서도 귀중하게 취급되었다. 멸치젓이 투명하고 맑은 이유로, “신령에게 드리기에 부정하지 않다”는 관념이 생겨나 제사상에 빠지지 않는 반찬이 되었고, 삼한시대부터 이어진 ‘젓갈=영혼의 음식’이라는 문화적 상징과 연결되기도 했다. 이러한 민속은 멸치를 먹는 생선이자, 보관하는 식재료, 나누는 공동체 자산, 조상을 위한 의례 식품으로서 위치시켰고, 그 자체가 생활의 역사가 되었다.
공동체 어로 문화와 세시풍속 속 멸치잡이의 기록
남해 멸치는 단순히 혼자 잡는 생선이 아니었다. 여러 명이 힘을 합쳐야 가능한 어업의 대표적인 예였다.
조선 후기 『동국문헌비고』에는 남해안에서 멸치를 잡을 때 “망을 들고 둘러쳐 어촌 사람들이 함께 줄을 당긴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지금의 두레망, 죽방렴 어로 방식의 역사적 기원으로 이어진다. 특히 봄철 대멸치 어획철이 되면 마을 전체가 멸치 어업에 참여했고, ‘멸치 떼가 들어오는 날은 관혼상제를 미룬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중요했다. 이 시기에 아이들은 망을 정리하고, 여성은 소금과 장독을 준비하고, 노인들은 기도와 풍어제를 준비했다. 이러한 ‘멸치 한철’의 문화는 곧 마을 전체의 생존 주기이자, 자연과 노동, 공동체가 교차하는 의례적 시간이기도 했다. 또한 정월 대보름 전후에는 멸치로 국을 끓여 한 해의 잡귀를 막고,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가 이루어졌으며, 이때는 마을마다 멸치젓을 첫 국물로 사용해 조상께 올리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즉 멸치는 단지 해산물이 아니라 마을의 생명력과 신앙, 노동과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오늘날 남해 멸치의 전통 계승과 문화 자산화
지금의 남해는 전국 멸치 생산량의 상위를 차지하며, 죽방렴 멸치, 손질 염장 멸치, 저염 발효 멸치젓 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해 있다.
멸치축제는 단순한 관광 행사를 넘어, 전통 어법과 조선 어세제도, 민속을 체험하는 역사 교육형 콘텐츠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죽방렴은 국가중요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천연 어업 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남해 멸치 산업은 한국 해양문화 보존의 상징이 되고 있다. 또한 남해군은 젓갈·멸치 교육관, 체험 어장, 남해멸치박물관 등을 통해 세대 간 전승 가능한 식문화 콘텐츠로 확대 중이며, 이를 기반으로 국내외 수출과 온라인 판매도 급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남해 멸치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역사 자산이자 식문화 기반 산업으로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