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 고추, 안동 권번과 양반가의 밥상을 붉게 물들이다
영양 고추, 조선 상류층 밥상의 색과 기운을 만든 붉은 유산
경상북도 영양은 고추의 본고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고장의 고추는 단순히 매운맛을 내기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조선 후기에 안동 양반가와 권번(券番, 여성 교육기관)의 상차림을 붉게 물들인 음식문화의 상징이었다.
고추는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 전래된 작물로, 그 정착 과정은 단순한 작물 도입이 아니라 지역의 지리·기후·문화·계급 구조에 따라 독특하게 분화된 채택과 진화의 기록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영양 고추는 맵지만 깔끔하고, 씨가 적으며, 육질이 단단해 가루로 빻아도 색이 곱고 발효성이 뛰어나 상류층의 장과 김치, 탕류에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안동과 영양 일대는 조선 후기 유림과 양반 문화를 대표하는 지역으로, 상차림의 격식과 미감, 약성과 상징성까지 고려된 음식 조리법이 발달했는데, 고추가 이 문화의 핵심 재료로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 글에서는 영양 고추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 권번과 양반가의 미각, 미의식, 위계질서, 나아가 지역의 전통 발효문화까지 어떻게 형성하고 계승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과 문화적 의미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풀어본다.
고추의 한반도 전래와 영양에서의 정착, 그리고 품종의 진화
고추는 중남미가 원산지로,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거쳐 한반도에 전래되었다. 최초의 기록은 『지봉유설』(1614)과 『산림경제』(1700년대 초반)로, 이들 문헌에서는 고추를 “매운 풀”, “홍초(紅椒)”라 언급하며 초기엔 약용이나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고추는 빠르게 토착화되며, 특히 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양념·발효식품 재료로 쓰이기 시작했고, 그중에서도 경북 영양 지역은 자연조건이 고추 재배에 매우 적합한 곳으로 부각되었다.
영양은 해발 고도가 높고 일교차가 커서 고추가 병충해에 강하며 당도와 매운맛이 균형 잡힌 품질로 자라난다. 또한 기후가 건조해 건고추로 말려도 색이 선명하고 향이 오래 유지되며, 발효 장류에 섞어도 잡냄새가 적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18세기 후반 이후 영양 고추는 안동을 중심으로 한 양반가와 권번 요리에서 ‘격을 높이는 붉은 양념’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특히 영양 고추는 씨가 적고 살이 두꺼워, 갈아도 가루 입자가 곱고 색이 균일하다. 이는 김치와 고추장, 떡볶음, 탕국 등에서 미관을 해치지 않으며 약성과 맛을 동시에 내는 고급 양념으로 평가받았고, 조선 후기 내방가사나 가문 요리책에도 고추의 사용법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안동 권번과 양반가 음식 문화 속 고추의 위상
조선 후기는 유교 질서가 강화되고, 상차림과 음식이 계급을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 요소로 작용하던 시기였다. 안동과 영양 일대는 대표적인 유림 중심 지역으로, 상류 가문에서는 음식의 색감과 재료의 의미까지 고려해 상을 차렸다.
고추는 이런 조선 상류 음식문화 속에서 맛뿐 아니라 ‘붉음’이라는 상징성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특히 권번(券番)은 당시 양반가 여성에게 예절·음식·문학·다도 등을 교육하던 교육기관으로, 요리 교육 과정에서는 고추를 이용한 다양한 장, 찜, 조림 조리법이 포함되어 있었다.
『음식디미방』이나 『규합총서』 등에서도 고추는 “고운 빛과 매운 기운으로 탕과 찜에 기품을 더하니, 남도 것보다 북도 것이 낫다”고 서술되며, ‘경북 지역 고추’의 우수성이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양반가에서 고추는 단순한 양념이 아니었다. 김치의 색깔, 고추장과 된장의 붉은 정도, 장아찌에 들어가는 고추의 식감과 향까지 각 가문마다 고유한 방식으로 고추를 다루는 방식이 존재했고, 이는 곧 가문의 음식 철학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 자산이었다.
영양 고추는 그 품질 덕분에 경상도 내 다른 지역보다 더 상류층 선호도가 높았고, 대구, 경주, 안동 등지로 꾸준히 유통되며 상류 음식문화의 중심 재료로 자리 잡았다.
민간 의례와 발효 식문화에서 고추가 가진 약성과 상징
고추는 단순한 양념을 넘어 조선 민간의례와 발효 문화 속에서 '열기'와 '기운'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고추의 매운맛은 한기(寒氣)를 몰아내고, 체온을 따뜻하게 하며,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어졌다.
『동의보감』에서도 고추는 “비위를 따뜻하게 하고, 기를 소통시키며, 풍한을 몰아낸다”는 약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고추는 장(醬)을 담글 때 반드시 함께 쓰이는 발효 보조재료로 쓰였고, 특히 영양 고추는 색이 선명하고 발효성이 뛰어나 고추장, 쌈장, 볶음장, 젓갈류에 자주 첨가되었다. 또한 고추는 제사 음식에서도 ‘붉은 기운으로 부정을 막고 정갈하게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고, 특히 고춧잎 장아찌, 고추전, 마른 고추 볶음 등은 지역별 제례상 고정 메뉴로 남아 있었다.
영양 고추는 이처럼 약성과 발효 친화성, 제례의 상징성까지 갖춘 특이한 식재료로, 조선 민속 속에서 음식 이상의 역할을 해냈다.
오늘날까지도 영양 고추로 만든 고추장은 ‘묵은 장조차 맛있게 만든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는다.
현대 영양 고추 산업의 발전과 전통의 계승
오늘날 영양은 국내 고추 재배 면적과 생산량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대표 산지이며, ‘영양산 고추’는 전국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매년 개최되는 ‘영양 고추 H.O.T Festival’은 단순한 농산물 판매 행사를 넘어, 조선 음식문화 재현, 전통 장 담그기 체험, 권번 요리 복원 시연 등 문화 중심형 축제로 확대되고 있다. 지역에서는 고추를 활용한 6차 산업 제품으로 고추된장, 고추소스, 고춧잎 장아찌, 고추씨 기름 등도 꾸준히 개발되고 있으며, 영양군농업기술센터와 한식재단은 고추 품종 보호와 전통 요리 교육에 힘쓰고 있다. 또한 지역 고추농가와 권번음식 보존회를 연결해 ‘고추를 매개로 한 음식 문화 콘텐츠’가 기획되고 있고, 이는 영양 고추가 단지 작물이 아닌 문화 자산으로 정체화되는 중요한 흐름이다. 이렇듯 영양 고추는 단지 맵고 붉은 채소가 아니라, 조선의 음식 철학, 유교적 예절, 여성 교육, 제례 문화, 그리고 지역의 자부심을 담고 있는 전통의 중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