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청송 사과, 일제강점기 개간 사업이 낳은 고지대 과수원 이야기
청송 사과, 단순한 과일이 아닌 시대의 풍경이 되다
경상북도 청송은 오늘날 ‘사과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청송 사과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된 배경에는 단순한 기후나 재배 기술을 넘는 역사적 맥락과 시대의 상흔이 깊게 배어 있다.
청송 사과의 시작은 일제강점기 산지 개간 정책과 조선총독부의 원예 사업, 그리고 그 속에서도 삶을 일구려 했던 청송 사람들의 땀과 자존심과 연결된다. 특히 1920~30년대, 청송의 험준한 산지를 개간해 사과나무를 심는 움직임은 식민지 경제 구조 속에서 탄생한 역설적인 자립의 상징이 되었고, 고지대 과수원은 근대적 농업과 지역공동체의 새로운 기반이 되었다.
고지대에 위치한 청송은 일교차가 크고, 화강암 기반의 배수가 잘 되는 토양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자연조건은 사과 재배에 유리했고, 여기에 일제의 조경정책이 맞물리면서 청송 사과의 시초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일제가 심었다’는 이야기는 청송 사과의 전부가 아니다. 그 땅을 갈고, 나무를 지키고, 품종을 개량하며 사과를 ‘청송의 이름’으로 만든 것은 청송 농민들의 손이었다.
이 글에서는 청송 사과가 어떻게 역사적 억압과 경제정책 속에서 생겨났고, 그것이 어떻게 오늘날 전국 최고의 사과 산지로 발전했는지, 그 뿌리 깊은 이야기를 역사와 지역의 맥락 속에서 풀어본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산지 개간과 사과나무의 도입
청송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비교적 낙후된 내륙 산지로, 주로 임업이나 자급농 중심의 경제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경제 기반 확장을 위해 산지 개간을 통한 원예작물 재배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산림지의 실용화’, ‘고지대 작물 시험사업’이라는 명목 아래 청송과 안동, 봉화 등지에서 사과나무 도입 실험이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에서 도입한 서양 사과 품종(주로 후지계, 홍옥계)을 중심으로, 경상북도 북부 고지대에 과수원 시험지를 설치하고, 이 지역 주민들에게 사과나무를 나눠주며 ‘자활 겸 수출 작물’로의 활용을 유도했다. 청송 역시 이러한 정책에 따라 1925년경부터 산간을 개간해 사과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특히 부동면·현서면·현동면 일대는 개간 면적이 빠르게 증가했다. 그 당시 청송 농민들은 낙엽송과 잡목을 베어내고, 경사가 급한 화강암 산지를 일구어 사과나무를 심었다. 이러한 노력은 단순히 지시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기존 농업으로는 생계를 잇기 어려운 현실 속에서 새로운 출로를 찾기 위한 생존의 선택이었다.
청송 사과는 바로 이 지점에서 태어났다. 억압적 식민지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그 나무를 가꾸고 과실을 맺게 한 주체는 청송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태어난 고지대 사과는 점차 ‘청송 사과’라는 이름을 얻으며 지역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청송의 자연 조건, ‘고지대 사과’가 만들어낸 품질의 차이
청송 사과가 특별한 이유는 기후와 지형 때문이다. 해발 250~600m 고지대에 위치한 청송은 여름과 가을의 일교차가 매우 커서 당분 축적이 잘 이루어지며, 사과가 단단하고 아삭한 식감을 가지게 된다. 또한 이 지역은 화강암 기반 토양으로 배수가 잘되고, 미네랄 함량이 풍부해 사과 껍질의 색이 선명하고 과육의 당도가 높다.
사과 재배 초창기에는 농약이나 비료 없이 순수하게 퇴비만으로 재배되었으며, 특히 1930~40년대에는 지주 중심이 아닌 소작농이 사과밭을 직접 관리하는 경우가 많아, 품질 유지에 대한 자부심과 기술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청송군이 자체적으로 사과 품종 개량과 재배기술 교육을 추진했고, 1970년대부터는 청송 사과가 서울·대구 도매시장에 ‘고급 사과’로 인식되며 명성을 얻게 되었다. 특히 ‘청송 부사’는 과거 홍옥 위주의 재배에서 변화한 대표 품종으로, 색이 진하고 당도가 높아 설 명절 선물용 고급 과일로 정착했다.
청송의 고지대 사과는 단순히 자연이 준 혜택이 아니라, 불리한 지형을 개간하고, 매년 기후 변화에 맞춰 적기 수확과 정성스런 저장을 반복해온 농민들의 시간과 노력이 빚어낸 결과다.
사과를 둘러싼 삶의 풍경 – 지역경제와 민속 속으로 스며들다
청송에서 사과는 단순한 작물이 아니라 한 세대의 삶과 직결된 생계 수단이자, 지역 공동체의 중심 산업이 되었다. 농한기에는 사과밭을 손질하고, 봄에는 꽃눈 솎기, 여름에는 봉지 씌우기, 가을에는 수확과 저장까지 마을 전체가 ‘사과 달력’에 맞춰 살아가는 삶을 형성하게 되었다.
청송 사과는 결혼 예물로도 쓰였고, 추석이나 설날에 ‘사과 10개 짜리 상자’를 보내는 것이 큰 선물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또한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 중 가장 위쪽, 중앙에 놓는 것이 사과였고, 지역에 따라 “청송 사과가 아니면 조상이 노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청송 사람들은 사과를 나누는 것을 이웃 간 정으로 여겼고, 흠집 없는 사과는 외부로 판매하고, 못난 사과는 조청을 내거나 사과말랭이로 저장해 겨울 양식으로 썼다. 이러한 생활 속의 활용과 민속적 가치는 청송 사과가 단지 농업 생산물이 아닌 공동체 문화의 일부분이었음을 보여준다.
오늘날의 청송 사과 산업, 그리고 역사적 유산으로서의 재조명
오늘날 청송은 대한민국 대표 사과 산지 중 하나로, 전국 생산량의 약 7% 이상을 차지하며, ‘청송사과’라는 브랜드는 프리미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청송사과축제’, ‘사과체험 마을’, ‘고지대 사과박물관’ 등은 단순한 농산물 판매를 넘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보여주는 콘텐츠로 확장되고 있다. 또한 청송군은 사과 재배에 스마트팜 기술을 접목하고, 청년농 부흥, 6차 산업 기반 확대를 추진하면서 사과를 매개로 한 지역 정주 모델을 실현해가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청송 사과의 시작이 식민지 시기 강제적 개간이라는 아픈 역사 속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를 통해 자립과 공동체를 일구어 낸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가 여전히 그 과수원 곳곳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청송 사과 한 입에는 외래 품종과 토착의 만남, 억압 속 개척의 의지, 그리고 마을을 지켜온 농부들의 땀과 시간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