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 표고버섯, 조선 약재 목록에서 찾은 그늘 아래 명약
산 그늘 속에 자란 향, 약재가 되다
전라남도 장흥은 지금도 ‘표고버섯의 고장’이라 불린다. 그늘지고 습한 산자락 아래에서 자라나는 표고버섯은 고소한 향과 깊은 맛을 지닌 웰빙 식재료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기원은 단지 현대 건강식품 산업에만 머물지 않는다.
조선시대의 의서와 약방 기록 속에서도 표고는 ‘향균(香菌)’ 또는 ‘향균초(香蕈草)’로 불리며 귀한 약재 중 하나로 취급되었고, 왕실과 사대부가에서도 감기·해열·기력회복에 좋은 약재이자 귀한 산중 음식으로 여겨졌다. 특히 장흥은 남부 해안과 인접하면서도 해풍을 막는 산악지대가 잘 조성되어 있고, 해마다 일정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는 삼림 구조 덕분에 자연 표고버섯 재배에 이상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지역적 특성과 조선 후기 약재 목록 속 ‘표고’의 등장은 장흥 지역이 표고버섯 재배와 유통의 중심지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 글에서는 조선시대 약재 목록과 고문헌에 나타난 표고버섯의 효능과 위상, 그리고 장흥이라는 지역이 어떻게 ‘표고 명산지’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역사 중심으로 조명해 본다.
표고버섯의 조선시대 기록 – 약재로 분류된 향기로운 균류
표고버섯은 조선시대 문헌에서 ‘향균(香菌)’, ‘향초(香蕈)’로 등장하며,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의약적 가치를 지닌 산중 식물로 여겨졌다.
『동의보감』에서는 “표고는 담을 삭이고 위를 보하며, 피로를 풀고 기를 보한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본초강목』에서도 “버섯 중 향이 맑고 기운이 따뜻하며 독이 없고, 약으로 쓰기에 적합하다”고 전한다.
표고는 특히 기침, 위장 장애, 기력 쇠약, 가벼운 발열과 같은 만성 증상에 효능이 있다고 여겨졌으며, 기존 약초들과 함께 달여 먹거나 술로 우려 복용하는 방식으로 쓰였다. 조선의 궁중 의약서인 『제중신편』과 『내의원상약수첩』에서도 ‘표고’를 보양용 약재로 분류하고 있으며, 이는 왕실 약방에서까지 표고버섯이 사용되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표고가 약초로 쓰일 경우에도 산지의 명확한 기록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향약집성방』에는 “전라도 산중 향초는 기운이 깊고, 뿌리와 모양이 단정하며, 약효가 오래간다”고 적혀 있으며, 이는 당시 남도 산림 지역에서 자생하는 표고가 특별히 우수하다고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간접적 증거다.
따라서 표고버섯은 단순한 부식물이 아닌, 자연이 내어준 의약자원으로서 조선의 의학과 생활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던 산중 명약이었다.
장흥 표고버섯의 기후·지형 조건과 재배 전통
전라남도 장흥은 예부터 해풍과 산풍이 동시에 영향을 주는 반(半)내륙성 해양지대다. 지리적으로는 장흥읍·유치면·장동면 일대가 해발 300~600m의 낮은 산지와 계곡지형으로 연결되어, 습도와 기온 변화가 일정한 삼림 환경이 형성되어 있다. 이처럼 그늘지고 일정한 온습도를 유지할 수 있는 지역은 표고버섯의 자연 재배와 배양에 최적화된 조건이다.
장흥 표고버섯은 예부터 참나무 원목을 활용해 천천히 자라게 만드는 ‘원목재배 방식’으로 재배돼 왔다. 『전라도속찬지리지』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장흥 일대에서 “해마다 봄과 가을, 나무껍질에서 향이 나는 곰팡이(菌草)를 채집하여 건조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초기 표고버섯 자생과 자연 채취, 그리고 가공 방식에 대한 간접적인 언급으로, 장흥 지역에서 표고가 일정한 식품자원으로 관리되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정조지』나 『임원경제지』와 같은 후기 농업서에는 “전라도 남부 표고는 건조하여 저장성이 뛰어나며, 탕약에 넣으면 향이 돋고 약성이 오래 지속된다”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은 장흥을 중심으로 남해안 산림 표고가 이미 상품성과 약효를 모두 갖춘 균류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장흥에서는 표고를 따는 일, 말리는 일, 포장하는 일까지 모두 집단적인 작업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조선시대부터 산림경제와 가족 공동노동의 일부로 표고 재배가 깊이 뿌리내려 있었음을 방증한다.
장흥 표고버섯의 민속과 생활 속 약재로서의 위상
표고버섯은 조선의 생활 속에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거나 제사 음식에 오르던 고급 식재료로 쓰였다. 특히 남부 지역에서는 설이나 추석 차례상에 말린 표고버섯을 물에 불려 조림이나 전으로 만들어 올리는 풍습이 오랜 기간 이어져 왔다.
장흥에서는 이러한 풍속이 보다 체계적으로 발전했다. 표고는 단순히 맛있는 버섯을 넘어, 몸을 따뜻하게 하고 기력을 보충하는 겨울철 건강식으로 널리 활용되었다. 지방 사대부 가문에서는 표고를 찹쌀과 함께 죽으로 끓여 설 명절에 조상의 신위 앞에 올렸고,
표고를 다진 후 계란에 섞어 전으로 부쳐 상차림에 올리는 전통도 전해진다.
민간요법으로도 표고는 꾸준히 활용되었다. 특히 장흥 지역에서는 건조한 표고를 약탕기에 넣고 감초·대추와 함께 달여 마시는 ‘표고차’가 감기 예방과 피로회복에 좋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는 지금도 일부 가정에서 전통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표고는 단순한 나물 반찬이 아니라, 예부터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고, 제사의 정성을 표현하며, 사대부의 식도락과 약용 식생활을 연결하는 다층적인 식물이었다.
오늘날 장흥 표고버섯 산업과 지역 유산으로의 확장
오늘날 장흥은 국내 원목 표고 생산량 1위 지역으로, ‘장흥 표고버섯’은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완료한 국가 인증 특산물 브랜드다. 특히 전통 원목 재배 방식을 고수하며 화학처리를 하지 않은 친환경 균상재배 기술을 접목해 고품질의 표고를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매년 열리는 ‘장흥 표고버섯 축제’는 단순한 농산물 직거래를 넘어 표고 따기 체험, 표고 전시관, 표고 약선 요리 시연, 표고 활용 의서 소개 등 문화·역사 콘텐츠가 함께 운영되는 지역 대표 행사다. 또한 장흥군은 표고버섯 연구소와 가공센터를 통해 버섯차, 버섯즙, 표고분말, 기능성 제품 등 6차 산업화에도 성공하고 있다.
무엇보다 표고는 여전히 장흥 사람들의 손끝에서 정성과 생명력을 담은 재료로 남아 있다. 그늘 아래에서 천천히 자란 버섯 한 송이는 조선의 약방, 사대부의 찻상, 그리고 오늘날 웰빙 식탁까지 이어지는 살아 있는 생물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