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삼척 미역줄기, 산간 해녀문화가 전해준 잊혀진 해초의 역사
미역의 줄기, 삼척의 여성들이 건져 올린 생활의 기록
강원도 삼척은 동해와 맞닿은 바닷마을이지만, 동시에 험준한 산지가 바다와 거의 맞닿은 지역이다. 그 덕분에 삼척의 해산물 문화는 내륙과 해안의 경계선 위에서 오랜 시간 독자적으로 발전해왔다. 그중에서도 미역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해초 식재료 중 하나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이 그 부속물인 ‘미역줄기’에 담긴 역사와 문화적 의미를 간과한다.
한때는 미역보다 오히려 더 귀하게 다뤄지던 미역줄기.
조선시대 삼척 일대의 해녀들은 줄기만 따로 채취해 염장·건조하여 진상품으로 바쳤고, 특히 강원 영동 지역에서는 미역줄기를 산간부의 약식, 보양식, 부녀자의 산후 회복 음식으로 전승해왔다.
미역은 전통적으로 자궁을 보호하고 피를 맑게 해준다고 여겨져 ‘산모 음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줄기 부분은 더 질기고 영양이 농축돼 있어 오랜 시간 해녀와 어부, 부녀자들만이 다루던 ‘삶을 위한 해초’로 인식되었다. 그리고 삼척은 미역과 그 줄기를 동시에 다루고 활용하는, 동해안 해녀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지역이었다.
이 글에서는 삼척 미역줄기가 조선시대 해조류 채취 문화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여성 중심의 해녀 문화, 식생활, 그리고 지역 민속으로 이어졌는지를 역사적 시선에서 조명한다.
조선 시대 기록 속 미역줄기의 존재와 삼척의 바다 여성들
조선시대 해조류에 대한 문헌은 상대적으로 드물지만, 일부 지역지와 의서에서는 미역과 관련된 풍속이 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강원도 삼척현 조에는 “봄이 되면 미역과 다시마가 많이 생산되며, 줄기를 염장하여 관리에 올린다”는 문장이 등장하고, 『동국여지승람』에서도 “미역과 곰피는 해녀가 잠수하여 채취하며, 줄기 부분은 절여 말려 진상한다”는 구절이 보인다. 이 두 기록은 미역줄기가 단지 부속물이 아니라, 독립적인 수산물로 인식되었으며, 그것이 삼척 해녀의 채취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삼척, 울진, 강릉 일대를 “여인들이 물속에 들어가 조개, 해초, 해류를 따는 풍속이 있다”고 서술하며, 이는 삼척 해녀문화의 뿌리가 조선 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랜 전통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해녀들은 깊은 바다보다는 해안 바위와 얕은 갯바위 주변에서 미역의 줄기를 베어내거나 따내어 따로 모으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 미역줄기는 귀한 식재료로 취급되었으며, 삼척의 해녀들은 미역의 잎과 줄기를 분리하여 각각의 용도에 맞게 가공했다. 줄기는 주로 절여 항아리에 담아 저장하거나, 겨울에 말려 내륙의 사대부가나 군량 창고로 유통되는 구조로 활용됐다. 이러한 전통은 단순히 해조류 채취의 기술을 넘어, 여성 주도의 수산 노동 문화와 지역 식생활의 역사를 함께 담고 있었다.
삼척 미역줄기, 산간지역에 전해진 해초의 약성과 약선 기록
삼척은 지형적으로 산이 바다와 맞닿아 있어, 해안에서 채취된 해산물이 내륙 산골까지 쉽게 유통되는 독특한 지리적 특성을 갖는다. 이 때문에 미역줄기 역시 내륙 마을까지 옮겨져, 식재료이자 약재로 활용되는 다양한 문화적 방식으로 전승되었다.
『동의보감』에는 미역을 “열을 내리고, 피를 맑게 하며, 여성의 자궁을 안정시킨다”고 했고, 『제중신편』에는 “줄기는 약성을 오래 간직하며, 음혈이 부족한 이에게 좋다”고 언급돼 있다. 이는 미역줄기가 단순히 미역 전체의 일부가 아닌, 더 강한 약효와 보존력을 가진 독립적 약재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삼척에서는 미역줄기를 소고기나 멸치 육수에 넣어 국물로 끓이거나, 표고버섯과 함께 조려내는 방식으로 약선 음식을 구성했으며, 이는 지금도 지역 전통 음식으로 일부 마을에서 전승된다. 특히 겨울철 산모나 병후 회복 중인 이들을 위해 미역줄기볶음, 미역줄기국, 미역줄기무침 등이 만들어졌으며, 삼척 부녀자들 사이에서는 “줄기 먹고 땀 흘리면 살이 돌아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회복과 재생을 상징하는 건강식으로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이런 음식은 여성들이 스스로 익히고 전승하는 구술·실천 문화의 형태로 이어졌고, 지금도 삼척의 일부 마을에서는 마을회관에서 노인들이 함께 미역줄기를 말리고 손질하는 풍경이 남아 있다.
해녀문화와 미역줄기 가공, 공동체 노동의 풍속
삼척의 해녀문화는 제주도의 그것과는 또 다른 형태로 전개됐다. 이곳의 해녀는 비상설적이고 계절 중심의 여성 노동 집단이었으며, 주로 3월~5월 사이에 해초 채취와 미역줄기 작업을 집중적으로 진행했다.
미역줄기는 채취 이후에도 많은 손이 드는 작업이었다. 먼저 해안에서 줄기를 따낸 뒤 민물에 씻고, 굵은 줄기를 소금에 절인 뒤 며칠간 햇볕에 말리는 공정이 필요했고, 건조된 줄기를 다시 가위로 잘게 썰거나 찢어 묶는 일까지도 마을 여성들이 함께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라, 공동체적 결속과 계절의 리듬을 함께하는 지역 풍속의 일부였다. 마을에서는 이 시기를 ‘줄기 걷는 달’이라 부르며, 노인들은 줄기의 탄력과 향을 통해 그 해 바다의 상태를 점쳤고, 어린 소녀들은 줄기를 말리는 작업을 도우며 조리법을 자연스럽게 배웠다. 줄기 말린 마당의 향은 곧 삼척 바다의 냄새이자, 여성의 손끝에서 이어진 삶의 내력이었다.
현대 삼척 미역줄기의 산업화와 전통 계승
오늘날 삼척은 미역뿐 아니라 미역줄기의 유통과 가공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삼척 해초영어조합’과 ‘삼척 미역마을 영농조합’ 등에서는 미역줄기 전문 건조·가공·포장 시설을 운영하며, 국내 유통은 물론 일본·미국 등지로의 수출도 점차 확대하고 있다.
삼척시는 미역줄기의 전통을 살리기 위해 ‘삼척 미역줄기 음식문화 축제’를 시범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 음식점에서는 ‘미역줄기한정식’, ‘삼척 바다한상’, ‘해녀차림’ 등의 이름으로 관련 음식을 상품화하고 있다. 또한 지역 교육기관과 연계해 초등학생 대상 해초 체험 교육과 미역 손질 수업을 통해 다음 세대에 전통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미역줄기는 단순한 조리재료를 넘어, 삼척 여성들의 노동, 약선 전통, 공동체 문화, 그리고 바다와 산을 잇는 해양 민속의 핵심 자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바다의 그늘진 곳에서 자라난 이 줄기들은 잊히지 않은 음식이 아니라, 오히려 다시 기억되어야 할 민속의 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