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남 여수 돌산갓, 조선 김장문화 속 항아리 옆을 지키다

insight-2007 2025. 7. 11. 22:32

김장독 옆에서 자리를 지켜온 ‘붉은 줄기’, 돌산갓의 시간

겨울이면 많은 이들의 손끝이 분주해진다. 배추를 절이고 고춧가루를 풀고, 생강과 마늘을 갈아 넣는 과정은 오랜 세월 한국인의 겨울 풍경으로 이어져 왔다. 그러나 김치의 중심에는 언제나 배추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도의 바닷가, 특히 전남 여수 돌산에서는 배추김치 옆에 갓김치가 늘 함께 자리했다. 그 중에서도 ‘돌산갓’은 단순한 부재료가 아닌, 남도 김장문화의 정체성과 별미로 자리 잡은 귀한 채소였다.

조선 김장문화 속 전남 여수 돌산갓

 

전남 여수시 돌산읍 일대는 조선시대부터 염전과 해조류, 소금 생산지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따뜻한 기후, 해풍이 만드는 독특한 토양이 채소 재배에 적합한 지역으로도 알려져 있었다. 특히 갓은 겨울철에도 쉽게 시들지 않고, 아린 맛과 풍부한 향이 조선 후기부터 김장용 부재료, 장아찌 재료, 심지어 민간 약재로까지 널리 활용되었다.

『경도잡지』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후기 문헌에서는 전라도 일대의 갓 재배가 활발했으며, “돌산 일대에서 나는 붉은 줄기의 갓은 김장에 넣으면 오래 두어도 물러지지 않고 맛이 좋다”는 기록도 확인된다. 이 글에서는 여수 돌산갓이 어떻게 김장문화 속에서 고유의 지위를 얻었으며, 그 뿌리 깊은 재배 전통과 오늘날까지 이어진 문화적 가치를 역사 중심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김장문화와 갓의 등장 – 배추 옆 붉은 줄기의 기록

김장은 단지 음식을 저장하는 기술이 아니라, 계절과 가족, 지역성을 담은 조선의 식문화였다.
『열양세시기』에는 조선 후기 양반가에서 “동짓달이 되면 배추, 무, 파, 갓, 마늘을 모두 장독에 담는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산림경제』에는 “갓은 늦가을에 심어 서리에 닿으면 줄기가 붉게 익고 맛이 진해진다”고 쓰여 있다. 여기서 말하는 ‘갓’은 오늘날의 돌산갓과 직접 연결되는 품종은 아닐 수 있으나, 남도 지역에서는 붉은 줄기와 짙은 향을 지닌 특이한 갓 품종이 오래도록 지역 김치의 주재료로 쓰여 왔음을 의미한다. 돌산갓은 이러한 조선의 갓 품종 중에서도 줄기가 굵고 붉은 빛을 띠며, 잎은 넓고 질기면서도 향이 강한 특수 품종이다. 이 갓은 돌산 일대의 해풍, 염도 높은 토양, 해양성 기후에서 자랐을 때 가장 향이 짙고 아린 맛이 깊다는 특징을 가진다.

조선 후기 전라도 지역 사족 가문에서는 김장철이 되면 배추김치와 갓김치를 따로 담갔고, 갓김치는 특히 ‘위장에 좋고 냉증에 효험이 있어 겨울 음식으로 으뜸’이라 전해졌다. 『동의보감』에는 “갓은 아린 맛으로 기를 내리고, 습기를 몰아내어 감기와 소화불량에 좋다”는 구절도 등장한다. 이처럼 갓은 조선시대 김장 부재료이자 약선 식재료, 그리고 제사와 제례상에도 오르는 채소로 꾸준히 사용되었고, 그 중심에는 점차 ‘돌산갓’이라는 품종이 그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수 돌산갓이 자리를 잡은 배경 – 바람과 토양이 만든 채소의 풍미

여수 돌산은 섬이자 반도인 지형 특성상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으며, 겨울에도 온화한 해풍이 불어온다. 이 해풍은 채소의 조직을 단단하게 만들고 병충해를 억제하는 작용을 하며, 갓이 향과 매운맛을 농축시키며 자라기 좋은 환경을 만든다.

돌산갓은 다른 갓 품종과 달리 잎이 넓고 광택이 있으며, 줄기가 두꺼워 김치로 담갔을 때 쉽게 물러지지 않고 아삭함이 오래 유지된다. 이러한 특성은 김장김치의 보존성을 높여주고, 장기 저장에도 맛이 덜 변하는 장점이 있어 조선 후기부터 궁중 진상용 갓김치로도 일부 사용되었다는 구전 기록도 전해진다.

여수 지역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가정마다 갓김치를 담그는 문화가 이어졌고, 1970~80년대 산업화 이후 김치 산업이 대중화되면서 돌산갓은 전국적으로도 ‘갓김치의 원조’로 인식되는 브랜드 작물이 되었다. 돌산갓은 단지 농산물 그 자체를 넘어, 여수 여성들의 김장 기술, 계절 음식 문화, 식재료의 분화 과정이 모두 녹아 있는 살아 있는 식문화의 한 갈래가 된 것이다.

민속 속 돌산갓김치 – 향과 시간이 담긴 남도의 밥상 문화

돌산갓은 주로 ‘갓김치’로 소비된다. 그런데 이 갓김치는 단순한 반찬을 넘어, 제사음식, 보양식, 유산균 발효식품으로까지 인식의 범위가 넓다.

전통적인 돌산갓김치는 생강, 마늘, 멸치액젓, 들깨가루, 찹쌀풀 등을 섞어 갓에 버무린 뒤, 김장독이나 항아리에 넣어 10~15일간 1차 숙성, 이후 저온 저장으로 장기 발효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돌산갓은 발효가 진행될수록 아린 맛이 유산으로 바뀌며 구수하고 깊은 풍미를 띠는데, 이 점이 배추김치나 깍두기와는 다른 ‘한겨울의 김치 반찬’으로서의 독자적 위상을 갖게 한 요인이다.

여수 지역에서는 돌산갓김치를 차례상에 올리거나, 회나 생선구이와 함께 상차림의 주찬으로 곁들이는 문화가 오래도록 이어졌으며, 이것은 조선 후기 사대부 가문에서 음식 간소화를 위해 “김치류 하나는 꼭 향 있는 것으로” 선택한 풍속과도 맞닿아 있다. 뿐만 아니라 갓김치의 향이 소화를 돕고 장을 튼튼하게 해준다는 속설 덕분에, 돌산갓김치는 노인식, 병후 회복식, 산모 음식으로도 선호되어 왔다. 갓의 향과 붉은 줄기, 깊은 발효 향은 남도 밥상 속에서 '김치 이상의 문화'로 정착되었고, 그 중심에 늘 돌산갓이 있었다.

현대의 돌산갓 산업과 문화 자원의 확장

현재 여수시는 전국 돌산갓 생산량의 약 70% 이상을 차지하며, ‘돌산갓’은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완료한 국가 인증 지역 특산물이다. 또한 ‘갓김치’ 역시 지역 명품 브랜드로 지정되어 지역 농업, 가공식품, 외식 산업까지 아우르는 핵심 자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수시와 지역 농민단체는 매년 ‘여수 돌산갓김치 축제’를 열어, 전통 김장 시연, 갓김치 담그기 체험, 김장용 갓 직거래 장터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전통 발효음식으로서 돌산갓김치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알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갓을 활용한 갓전, 갓국수, 갓부각, 갓피클 등 다양한 6차 산업 제품도 개발되어 젊은 층을 위한 감각적인 지역 특산물 콘텐츠로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돌산갓은 단지 남도의 채소가 아니라, 김장이라는 한국 고유의 계절 음식 문화, 여성들의 발효 기술, 그리고 지역 농업의 정체성을 모두 담고 있는 살아 있는 문화 자산이다.

한겨울 항아리 옆에서 조용히 향을 품던 붉은 줄기 돌산갓은 오늘날까지도 여수 땅의 맛과 이야기를 가장 선명하게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