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덕 복숭아, 선조들이 왕세자에게 바친 여름 과일의 기록
여름 궁궐로 향하던 과일 바구니 속, 영덕 복숭아의 자리
대한민국에서 여름 과일을 이야기할 때 복숭아는 빠질 수 없다. 부드러운 털, 향긋한 단맛, 풍부한 과즙을 지닌 복숭아는 더운 계절에 사람들의 입맛을 달래주며 다양한 품종으로 사랑받아왔다. 하지만 복숭아는 단지 계절 과일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서 왕실의 진상품이자 고위 관료가 귀한 손님에게 내놓던 ‘격 있는 과일’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해온 과일이기도 하다.
특히 경상북도 영덕군에서 생산되는 복숭아는 조선 시대부터 진상 과일로 주목받았다. 『승정원일기』와 『조선왕조실록』 일부 기사에는 경상도 지역 복숭아의 진상 기록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그중에서도 영덕, 예천, 상주 등의 복숭아가 왕세자와 세자빈의 여름 식단에 올랐다는 표현이 확인된다. 이 기록은 단순한 농업 보고서가 아닌, 농산물의 사회적 격을 반영하는 정치·문화적 문서로서 의미가 있다.
이 글에서는 영덕 복숭아가 어떻게 조선 왕실과 연결되어 진상품으로 취급되었으며, 영덕의 지형·풍토·민속과 어떤 방식으로 복숭아 재배와 연결되었는지, 그리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브랜드 과일로서의 위상을 역사적 관점에서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 시대 복숭아 진상품의 전통 – 왕실에 바쳐진 여름 과일
복숭아는 예부터 길상(吉祥)의 상징이자 장수를 기원하는 과일로 여겨졌다. 중국의 도교와 유교 문화가 전래되며 조선 사회에서도 복숭아는 불로장생, 복덕, 자손 번창을 상징하는 귀한 과실로 인식되었고, 왕실과 사대부 가문에서는 무더운 여름을 견디게 하는 보양 과일로 복숭아를 즐겨 찾았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6년(1416) 기사에는 “경상도에서 과일을 올려보냈는데, 복숭아와 오얏이 빼어나기에 세자에게 내려보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 ‘경상도’는 매우 넓은 개념이지만, 당시 복숭아 생산지가 일부 한정적이었다는 점에서, 영덕을 포함한 동해 중북부의 고지대 지역에서 재배된 복숭아가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승정원일기』 숙종 연간 기사에는 “영해부(오늘날 영덕군 일대) 복숭아가 달고 향이 높아, 그 잎은 수라상의 장식으로도 쓴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단순히 식용뿐 아니라 궁중 미학적 요소로까지 복숭아가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근거다. 이처럼 복숭아는 배나 감보다 훨씬 더 상징성이 높은 과일이었고, 그 재배지 역시 품질과 향, 외형이 일정 수준 이상일 때만 왕실 진상 목록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기준을 꾸준히 충족했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경북 영덕이었다.
영덕의 지리적 특성과 복숭아 품종의 전통적 우수성
영덕은 경북 동해안 중앙부에 위치해 있으며, 내륙에는 해발 100~400m 고지대가 분포하고, 일조량이 길며 바람이 잘 통하는 지형이다. 복숭아는 일반적으로 일교차가 크고, 바람이 건조하며, 배수가 잘 되는 모래성 토양에서 당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영덕의 지형과 기후는 복숭아 재배에 매우 유리하다.
조선 후기 문헌인 『산림경제』에는 “도(桃)는 산기슭에 심는 것이 좋고, 바람을 맞되 습하지 않게 하라”고 되어 있으며, 『임원경제지』 역시 “복숭아는 음지가 아닌 양지에 두고, 과습을 피해야 단단한 과실이 맺히니 바닷가 높은 마을에서 맛이 좋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은 곧 영덕의 자연 환경이 복숭아 품종에 최적화되었음을 반증한다.
영덕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재래종 복숭아 외에도 천도복숭아·백도·황도 등을 토착화시켜 여러 품종으로 재배해 왔으며, 이는 조선 후기 사대부들의 농업일기나 시문 속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특히 영덕의 ‘복사촌(桃里)’이라는 지명은 과거에 복숭아 재배가 활발했던 마을을 뜻하며, 지금도 일부 지역에서 그 이름이 남아 있다. 영덕 복숭아는 타 지역보다 당도가 높고 향이 강하며, 조기 수확이 가능한 장점 덕분에 진상품으로 적합한 고급 과일로 자리매김해 왔다.
복숭아와 민속 – 영덕 지역의 여름 제사와 복숭아의 상징성
복숭아는 한국 전통문화에서 음식 그 이상으로 기능했던 과일이다. 복숭아는 제사상에 올리는 주요 제물 중 하나였으며, 특히 여름철 보양식 이후 후식으로 사용되어 ‘몸의 열을 내리고 마음을 맑게 한다’는 믿음과 함께 소비되었다. 영덕 지역에서는 여름 제사, 입하(立夏)나 소서(小暑) 절기 무렵, 복숭아를 올리는 풍속이 있었고, 농가에서는 복숭아나무 가지를 집안 문 위에 걸어 재액을 물리치는 민속 신앙으로도 활용했다.
『동국세시기』에는 “복숭아는 도깨비가 싫어하는 향이라 하여 집안에 꽂으면 액운을 막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경북 동해안 일대에서는 복숭아와 수박을 함께 깎아 찬물에 담가 마시는 전통이 전해지며, 이것은 더위 먹은 노인이나 어린아이의 열을 내리기 위한 민간요법으로 사용되었다. 이런 민속은 단지 음식의 기능을 넘어,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생태문화로 복숭아가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전통의 중심에 ‘영덕 복숭아’가 있었다. 복숭아는 단순히 맛있는 과일이 아니라, 영덕 사람들의 여름과 제사, 신앙과 환대의 상징이 된 작물이었다.
현대의 영덕 복숭아 산업과 문화 콘텐츠로의 확장
현재 영덕군은 복숭아 재배면적 약 250ha 이상을 보유하며, 경북 내에서도 품질 면에서 손꼽히는 복숭아 주산지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영덕 황금 복숭아’, ‘영덕 조생 백도’ 등은 당도와 육질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 국내 프리미엄 시장에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영덕군은 복숭아의 문화적 가치를 확산하기 위해 ‘영덕 복숭아 체험축제’, ‘복숭아 요리 경연대회’, ‘복숭아 전통 민속관 전시’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 복숭아를 단순한 농산물이 아닌 문화유산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또한 지역 학교와 연계해 복숭아 나무 심기 체험, 복숭아 잼 만들기, 옛 진상품 상차림 재현 수업 등을 실시하며,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복숭아의 역사와 전통을 교육하는 콘텐츠도 확산 중이다.
무엇보다 복숭아는 지금도 여름이 되면 왕실의 식단을 연상하게 하고, 과일 바구니에 가장 먼저 담기는 과일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영덕 복숭아는 단맛 이상의 전통과 상징을 품은 살아 있는 여름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