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경남 창녕 양파, 개화기 일본 농정 기술과 지역 자립의 교차점

insight-2007 2025. 7. 16. 10:26

외래 작물이 전통의 밭에 스며든 날부터

대한민국에서 ‘양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역이 바로 경남 창녕이다. 넓은 들판, 맑은 물, 긴 일조량 속에서 자란 창녕 양파는 지금은 전국 양파 생산량의 2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규모도, 인지도도 높은 특산물이다. 그런데 이 양파가 처음부터 토종 작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다. 실제로 양파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외래 식물로 처음 소개되었고, 본격적인 재배는 개화기 이후 일본 농정 기술이 도입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던 지역 중 하나가 바로 경남 창녕이었다.

개화기 일본 농정 기술 도입후의 경남 창녕 양파


창녕은 일제강점기 초기 농정 실험과 기술 보급의 전초기지로 기능했고, 이 시기에 양파가 주요 식량 보조작물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글에서는 창녕 양파가 어떻게 외래 작물에서 지역 정체성을 상징하는 특산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놓인 농정사, 지역민의 자립 의지, 경제적 전환의 흐름을 역사 중심의 시각으로 짚어보려 한다.

외래 작물 양파의 도입과 조선 말기 식재 시도

양파는 동남아, 인도, 중동 지역이 원산지인 작물로 동양에서는 비교적 늦게 전파된 채소에 속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후기에 중국을 거쳐 유입된 흔적이 있으나, 그 활용은 제한적이었고 본격적인 재배는 개화기 이후 일본 농정 당국의 실험 재배를 통해 시작되었다.

조선 말기 농업 백과인 『산림경제』에는 “서양 향채(洋香菜)”라는 이름으로 마늘과 흡사하나 향이 강하고 알이 둥근 식물이 언급되며, 이것이 양파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 해도 양파는 약용이나 일부 궁중 요리에서만 사용되었고, 일반 민가의 식탁에는 오르지 못했다.

양파의 상업적 재배는 1900년대 초 일본 농업기술자들이 경남 일대에 실험포를 설치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조선총독부 농정통계(1912)』에는 “창녕·밀양·김해 일대에서 서양 향채류 시범재배 시작”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특히 창녕군은 나루터와 교통이 발달한 평야지대였고, 고령군·합천군과의 접경지에서 상습 홍수 피해 후 대체 작물 재배지로 주목받았다. 이 시기의 양파는 현지 민가에 종자를 나눠주고, 일본식 농법과 함께 건조 저장, 층층 적재 방식 등을 교육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즉, 양파는 처음엔 외래 작물로 도입되었지만, 빠르게 창녕 지역의 환경에 맞춘 품종 개량과 지역 재배 전통으로 정착해 가기 시작했다.

창녕 양파의 정착 – 농민 자립과 농업기술 전환기의 상징

양파가 본격적인 작물로 성장한 시기는 1930~40년대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창녕 지역은 쌀과 보리를 중심으로 하는 곡창지였지만, 홍수와 병해 피해가 반복되면서 대체작물로 양파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또한 양파는 타작물에 비해 수확 시기가 빠르고, 가격 안정성이 높아 농가 입장에서 위험을 분산할 수 있는 품목으로 주목되었다. 이 시기에 창녕 지역에서는 일본 품종과 자생 교잡을 통한 지역형 양파 품종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창녕양파’라는 명칭이 농촌 통계에 본격 등장하게 된다.

양파는 단지 수익 작물로서만 의미가 있던 것은 아니다. 양파는 농한기에 작업 인력을 활용할 수 있고, 건조와 저장이 가능하며, 식생활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개화기 도시 식문화와도 잘 어울리는 작물이었다. 창녕 농민들은 양파를 통해 스스로 재배 기술을 축적하고, 일본 기술과의 구별을 시도하며, 자립적 품종 개발까지 추진하는 실질적 주체로 거듭나게 된다. 창녕 양파의 정착은 곧 지역 자립 농업의 상징이 되었으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역민의 식량주권과 경제적 독립성의 상징으로 작용해 왔다.

현대의 창녕 양파 – 산업화와 브랜드화를 향한 길

오늘날 창녕 양파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양파 브랜드로 자리매김했다. 기후, 토양, 지형, 수자원 등 양파 생육에 최적화된 자연 조건을 갖춘 창녕은 경남뿐 아니라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주산지로 꼽힌다. 창녕군은 약 2,000여 농가가 양파를 재배하며, 연간 생산량은 약 30만 톤을 웃돈다. 대표 품종으로는 ‘창녕홍양파’, ‘창녕백양파’, ‘노지 저장양파’ 등이 있으며, 당도와 수분 비율, 저장성 면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999년 창녕군은 양파를 중심으로 한 농산물 공동 브랜드 ‘창녕농협양파’를 출범했고, 이후 2013년에는 ‘창녕양파 지리적 표시제 제60호’ 등록을 완료하여 국가 인증 특산물로도 인정받았다. 또한 창녕 양파축제, 양파요리 경연대회, 양파치즈·양파맥주 같은 6차 산업 융복합 콘텐츠 개발을 통해 단지 농업을 넘어 문화·관광·브랜드 산업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이처럼 창녕 양파는 단지 농작물이 아니라, 한 지역이 외래 작물을 자산으로 전환한 대표적 성공 사례로 기능하고 있다.

창녕 양파에 깃든 의미 – 외래 작물에서 문화 유산으로

창녕 양파는 단지 경남 평야에 잘 자라는 작물이 아니다. 그 뿌리는 조선 말기 외래 작물 도입기부터 시작되었고, 개화기~일제강점기를 거쳐 지역민이 외래 농법을 내재화하고 지역화한 대표 작물로 변모시킨 역사를 지닌다.

양파는 이제 창녕의 브랜드이자 지역민의 정체성을 말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그 생산과정에는 자립의 역사, 기술의 내재화, 지역 공동체의 협동이 녹아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를 담은 작물이기 때문에 그 가치 또한 특별하다.

오늘날 창녕 양파는 전국 각지로 유통되어 수많은 식탁 위에 오르고 있지만, 그 한 조각 안에는 ‘타지에서 온 종자가 한 지역에 뿌리내려 문화가 되고 유산이 된 이야기’가 함께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