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보은 대추, 속리산 법주사 승려들이 키운 붉은 선물
사찰이 전한 대추 한 알, 지역의 역사가 되다
충북 보은의 대추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다. 이 과일은 천 년 넘게 속리산 법주사라는 역사적 공간에서 뿌리내린 생명의 열매이며, 불교 사상, 농업기술, 제례문화,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역사와 문화가 얽혀 있는 존재다.
대추나무는 오랜 세월 민가와 사찰, 약방과 궁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간에서 사용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속리산 일대에서 자란 보은 대추는 특유의 크기와 단단함, 깊은 당도로 예로부터 특별히 평가받아왔다. 이러한 품질은 단순한 기후나 토양 조건 때문만은 아니다. 신라 진흥왕 때 창건된 법주사가 고려·조선 시기를 거쳐 충청권 최대의 사찰로 성장하면서, 사찰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자급농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 그 과정에서 대추는 공양과 약용, 예불 및 사찰 재정 운영의 일부로 활용되는 중요한 작물로 자리잡았다.
이 글에서는 보은 대추가 단지 지역 특산물이 아닌, 천 년의 불교문화 속에서 형성된 생활농업의 산물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전통 식문화의 상징이라는 점을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하고자 한다.
속리산과 대추의 첫 만남 – 법주사의 경내에서 자란 열매
속리산은 신라시대부터 국토의 중심에서 불교적 신령성이 깃든 성산(聖山)으로 여겨졌다. 이곳에 위치한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년) 경흥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고, 통일신라 이후 왕실의 원찰로 지정되며 국가 주도의 불교 중심지로 부상했다. 사찰은 단지 종교 수행의 공간만이 아니었다. 법주사는 속리산 전역에 걸쳐 100여 곳의 암자와 포교소, 경작지를 관리하며 농림업을 통한 경제적 자립을 추구했고, 그 중 하나로 과수 재배도 중시되었다. 특히 대추나무는 높은 해발, 풍부한 일조량, 밤낮의 큰 일교차, 배수에 유리한 경사지라는 속리산 특유의 환경과 잘 맞아떨어졌다.
조선 후기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법주사 주변에는 대추, 밤, 감이 풍성히 열리며, 이들은 사찰 약재와 공양물로 쓰인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승람(僧覽)』이나 『석보상절』과 같은 불교 기록에는 법주사 승려들이 자급자족 생활을 위해 대추를 약탕재로 달이거나, 건조 후 장기간 보관해 계절 간 공양물로 활용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따라서 보은 대추는 단지 우연히 생겨난 특산물이 아니라, 사찰의 철학과 경제, 불교의 생활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육성된 작물이었다.
보은 대추의 확산 – 속리산 승려들 손에서 마을로
고려 말~조선 중기 이후, 법주사에서 수행한 승려들이 포교 활동이나 사찰 내·외부 노동 분담을 통해 마을 주민들과 밀접하게 교류하게 되면서, 대추나무는 점차 사찰 외곽으로 확산되었다. 속리산 자락에 위치한 말티고개, 삼가면, 산외면 일대에는 법주사의 농업 기술과 식물 재배법이 전해졌고, 이로 인해 대추 재배는 마을 단위의 전통 작물로 정착하기 시작했다.
대추는 특히 조선 후기의 혼례·제례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녔는데,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담긴 대추는 혼례상과 돌상에 반드시 오르는 과일이었으며, 집안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뜻으로 선물용 수요도 꾸준히 증가했다.
보은 대추는 그 품질과 저장성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서울, 경기도 관청에까지 진상되었다는 기록이 구한말 의궤 문헌에 실려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조선산물지(朝鮮産物誌)』에는 “보은산 대추는 경성상회나 일본 요코하마 상단에서도 인기 품목”이라는 구절이 실려, 일제 강점기에도 ‘품질 좋은 대추’로서 국내외 유통망에 실려 나간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보은 대추의 현대적 전환 – 전통과 브랜드의 만남
광복 이후, 보은 지역은 대추를 지역 경제의 핵심 작물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속리산 일대에 본격적인 대추 전업 농가들이 형성되었고, 1985년 시작된 보은 대추축제는 지역 전통 작물의 가치를 스스로 재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은군은 ‘속리산 황토대추’라는 명칭을 통해 토양의 특성과 역사성을 결합한 고유 브랜드를 구축하였으며, 현재는 2차 가공 식품, 대추한과, 대추주 등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식품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대추의 뿌리가 단순한 농업 작물이 아닌, 법주사라는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에서 시작된 역사적 산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깊은 의미를 지닌다. 특히 2023년 문화재청은 보은 대추 재배지 일대를 '전통경관형 농업문화유산'으로 등재 예비 검토하기 시작했고, 이는 보은 대추가 단지 생산 품목을 넘어, 한국 농업사와 생활문화사의 귀중한 기록물이라는 인식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보은 대추, 붉은 과일에 깃든 천년의 기억
한 알의 대추가 열매 맺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짧지 않다. 그만큼 보은 대추에는 속리산 자락의 시간, 승려들의 손길, 마을의 삶이 중첩되어 있다. 사찰의 담장 안에서 시작된 대추는 이제 천 년의 역사와 함께 지역 공동체의 정신과 경제를 지탱하는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에도 보은 대추는 건강 식품, 선물 세트, 약용 과일 등으로 활발히 유통되고 있으며, 그 속에는 법주사에서 이어진 자급의 철학, 속리산 자연환경의 힘, 그리고 민속과 예불을 잇는 정서적 유산이 깃들어 있다. 보은 대추는 이제 단지 지역 농산물이 아닌, 한국의 불교 원예 문화와 전통 생활 농업의 흔적을 간직한 살아 있는 문화자산이다. 이 작은 붉은 과일은 시간을 견뎌낸 선물이며, 속리산과 법주사, 그리고 보은이라는 이름을 오늘에까지 이어주는 역사적 매개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