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 다시마, 선사시대 움집 식단에서 궁중 진미로
다시마의 시간, 고흥의 바다에서 피어난 음식 문화의 원형
한국인의 밥상에서 다시마는 단순한 감칠맛의 재료를 넘어선다. 그것은 곧 우리 민족의 해양 문화와 식생활이 시작된 지점이며, 생존과 장수, 공동체 식문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전라남도 고흥에서 생산되는 ‘고흥 다시마’는 수천 년 동안 바다와 함께 살아온 한반도인의 식사 풍경을 증언하는 특산물이다. 고흥의 해안은 남해안 중에서도 특히 해양 생태계가 풍부한 천혜의 조건을 지닌 지역으로, 오랜 세월 동안 해조류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최근 들어 고흥 다시마는 건강식품, 미식 요리, 천연 기능성 소재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이 다시마는 단지 현대인의 입맛을 위한 상품이 아니라, 선사시대 움집에서 시작된 식문화의 한 축이었으며, 조선 시대 궁중 진상 음식으로까지 격상된 장대한 역사적 궤적을 품고 있다.
이 글에서는 고흥 다시마의 선사시대 식단으로서의 역할, 조선 시대 궁중 요리로의 발전, 지역 생태와 노동의 전통, 그리고 현대에서의 문화적·산업적 가치를 통합적으로 탐색한다. 이를 통해 고흥 다시마가 단순한 식재료를 넘어서 어떻게 한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고흥이라는 땅과 어떻게 유기적으로 성장해왔는지를 되짚어본다.
움집 시대의 해조류, 고흥 다시마의 기원을 찾아서
한반도는 구석기 이후 해안선을 따라 인간의 삶이 발달해온 해양국가다. 특히 전남 고흥은 수많은 선사시대 유적이 발굴된 지역 중 하나로, 고흥 봉래면과 도화면 일대에서는 움집과 패총이 발견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다시마, 미역, 톳 등 해조류의 흔적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러한 고고학적 증거는 다시마가 이미 선사시대부터 제대로 된 조리 식단의 일부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평가된다.
선사시대의 해안 마을에서는 어패류와 해조류를 함께 섭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불과 불가마를 이용한 가열 조리법이 등장하면서, 다시마는 국물의 맛을 내는 기본 재료로 사용되거나 말려서 저장식품으로 활용되었다. 당시의 움집 주민들은 해조류를 건조해 겨울철 식량으로 보관했고, 이는 곧 구황식품의 시초가 되었다.
고흥 지역은 그 지리적 특성상 조류의 흐름이 빠르고 조간대가 넓으며, 미네랄과 영양분이 풍부한 바다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해양조건은 다시마 생육에 최적이며, 자연 상태에서도 쉽게 채취할 수 있었던 작물이었다. 문헌은 없지만, 민속학적으로 분석하면 다시마는 일찍이 고흥의 주식 보조재로 기능했으며, 제사나 공동체 의례에서 ‘바다의 정화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다시마는 수렵·채집 시기의 식재료 중에서도 특히 가열 후 식감이 좋아, 장기적인 소비와 조리 발달에 유리한 식재료였다. 이러한 특성은 시간이 지나며 조리법의 발전과 함께 다시마의 입지를 점점 더 강화시켰고, 고흥에서는 후대까지도 조리 문화의 기본 베이스로 계속해서 사용되었다.
고흥 다시마와 조선 왕실, 궁중 진미로의 여정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다시마는 본격적인 ‘음식 재료’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왕실 진상품, 약재, 의례용 식자재로서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승정원일기』와 『의궤』 등의 조선시대 문헌을 통해 확인하면, 궁중에서는 정기적으로 전라남도 지방에서 다시마, 미역, 해삼 등의 수산물을 진상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고흥 다시마’는 특히 품질면에서 뛰어나다는 이유로 상등품으로 분류되었으며, 궁중 수라간에서는 이를 곰국, 장국, 탕반, 어선식 등의 기초 육수 재료로 사용했다. 다시마의 감칠맛은 오늘날로 치면 ‘MSG 없는 천연 감칠맛’으로, 왕실에서는 이를 위장에 부담 없는 조미료로 활용했다.
고흥 다시마가 왕실의 식탁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고흥의 지리적·생태적 특성과 함께, 조선 후기 수산업 조직의 구조화도 큰 영향을 미쳤다. 고흥은 이미 17세기 중반부터 전라도 수군과 세곡선의 주요 거점으로 기능하며, 조정에 대한 해산물 공급의 핵심 통로 역할을 해왔다. 고흥군 일대에서는 영리적인 수산물 채취 조직이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 조직은 일정한 규격과 품질 기준에 따라 다시마를 수확하고 건조해 조정에 납품했다.
한편 다시마는 왕실에서 단순한 식자재를 넘어 보양식 및 의약 보조재로도 취급되었다. 『동의보감』에서도 “해조류 중 다시마는 혈액을 맑게 하고, 열을 내리며, 부기를 가라앉히는 약초로서의 기능을 가진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배경은 고흥 다시마가 단순한 해조류가 아닌, ‘궁중 식문화의 품격을 지탱하는 기본 식재료’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고흥 다시마를 만든 자연과 사람, 해안 노동의 전통
고흥 다시마의 우수성은 단지 역사나 문헌 속 기록에 의해서만 입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흥이라는 지역이 지닌 독보적인 해양 환경, 그리고 이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전통적 노동 방식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고흥은 전라남도 남해안 중에서도 조류의 흐름이 강하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염도가 일정한 청정 해역으로 분류된다. 다시마는 이런 환경에서 자라야 두껍고 질감이 좋으며, 색상이 진하고 점성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동해안 다시마는 얇고 향이 강한 편이라면, 고흥 다시마는 두께감과 부드러움, 풍부한 감칠맛이 특징이다.
고흥에서는 다시마를 ‘단순 채취’하지 않는다. 바위에 붙은 자연산 다시마뿐 아니라, 인공 양식장을 설치하여 계절별로 관리하고, 적정 수온과 수심을 유지하며 성장 주기를 조절한다. 특히 5월~6월 수확기에는 바닷가 마을 전체가 다시마 작업에 참여하는 전통이 있다. 어른들은 물질을 하고, 아이들은 해변에서 건조 작업을 돕는다. 이는 가족 단위 공동노동 문화로 이어져, 고흥의 해안 마을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다시마를 말리는 방식도 독특하다. 고흥에서는 ‘반건조 후 햇볕에 3회 이상 말리는 삼건법’을 사용해, 변색을 막고 영양 손실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가공한다. 이 과정에서 바람과 햇빛, 습도, 염도의 조합을 고려해 사람의 손이 섬세하게 개입한다. 그 결과 고흥 다시마는 일정한 두께와 색, 탄력을 유지하며 품질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이처럼 고흥 다시마는 자연 그대로의 선물인 동시에, 수세기 동안 이어진 인간의 섬세한 감각과 전통적 지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단순한 해조류가 아닌, 자연-노동-문화의 삼박자가 이루어진 복합적 산물이다.
오늘의 고흥 다시마, 과거를 품고 미래를 향하는 바다의 유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고흥 다시마는 단지 건강식품이 아닌, 문화와 산업을 동시에 이끄는 지역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고흥군은 다시마의 전통 가공법을 보존하고, 지역 특화작물로 육성하기 위해 ‘고흥 다시마 지리적 표시제’ 등록과 함께 식품가공 R&D 기반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현재 고흥 다시마는 건강 기능성 식품, 천연 조미료, 해조류 화장품, 바이오 필름 소재 등으로 다양한 산업에 활용되고 있으며, 해외 수출 역시 활발하다. 특히 일본, 대만, 동남아 지역에서는 고흥 다시마가 ‘프리미엄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으며, 세계 해조류 시장에서 한국산 해조류의 입지를 넓히는 데 기여하고 있다.
문화적 측면에서도 고흥 다시마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기억과 생활, 그리고 자연과 노동의 서사를 함께 담고 있는 유산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고흥군에서는 매년 ‘고흥 해조류 축제’를 개최하며, 다시마 수확 체험, 다시마 전통 가공 시연, 다시마 음식 경연대회 등을 통해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흥 다시마는 ‘건강’과 ‘지속가능성’을 모두 담은 식자재라는 점에서, 현대인의 가치관에도 부합한다. 미세플라스틱 문제, 인공조미료 기피 현상, 지속가능한 식단 추구 등이 강화되면서 고흥 다시마의 ‘천연성’, ‘전통성’, ‘기능성’은 더욱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고흥 다시마, 선사와 궁중을 넘어 미래로 이어지는 바다의 맛
고흥 다시마는 바다에서 태어난 생물이지만, 사람의 손과 지혜, 문화와 역사를 통해 빚어진 ‘음식 이상의 유산’이다. 선사시대 움집 식단에서부터, 조선 왕실의 수라간까지, 그리고 오늘날 글로벌 식품 산업과 건강한 삶을 지향하는 현대인의 밥상까지—고흥 다시마는 시간을 가로지르며 살아 있는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이 해조류는 단지 맛을 내는 조미료가 아니다. 그것은 지역이 자연과 함께 살아온 방식이며, 사람들이 삶을 꾸려온 기술이고, 땀과 햇빛, 그리고 바람으로 빚어진 생명의 결실이다.
앞으로도 고흥 다시마는 한국의 바다 음식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의 식탁과 기억 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과거에서 온 이 작지만 위대한 식물은, 여전히 우리 곁에서 생명을 지탱하고, 문화를 만들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