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북 순창 고추장, 조선 궁중 조리서에 등장한 발효의 고향

insight-2007 2025. 7. 24. 10:34

붉은 장의 고향, 순창에서 전해지는 장독대의 기억

전라북도 순창은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발효 식품, 고추장의 본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고추장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지역이 바로 순창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이곳이 어떤 위상을 지닌 지역인지 짐작할 수 있다. 순창 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 사람, 전통, 그리고 시간의 발효가 결합된 복합 문화 자산이다.

조선 궁중 조리서에 등장한 전북 순창 고추장

 

고추장이 한국인의 식생활에 자리 잡은 역사는 수백 년에 이르며, 특히 조선시대에는 궁중 음식의 양념으로도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다수의 조리서에서 확인된다. 이때도 가장 품질이 좋다고 알려진 고추장은 순창 지역에서 생산된 고추장이었다. 순창은 풍부한 일조량, 청정한 물, 그리고 넓은 들판을 갖춘 지역으로, 장을 담그기에 가장 이상적인 조건을 지녔다. 이 덕분에 조선시대에도 고추장 제조의 중심지로 자리잡았고, 그 명성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글에서는 순창 고추장이 어떻게 탄생하고 전파되었는지를 역사적 관점에서 조명하며, 그 안에 담긴 지역 농업과 가정식 문화, 궁중식단과 민속 지혜의 연결고리를 밝혀본다. 이를 통해 단지 매운 양념으로 치부되기 쉬운 고추장이 사실은 한국 식문화의 핵심 유산이자 세계에 내놓을 만한 발효 기술의 결정체임을 증명하고자 한다.

고추의 전래와 조선 장문화의 변화, 순창 고추장의 기원

고추장이 조선 전기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원래 한국의 장류는 메주를 기본으로 하는 간장과 된장이 중심이었으며, 매운맛이라는 요소는 장기간 한국 식문화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임진왜란 이후 고추가 전래되면서 식문화의 큰 전환이 시작되었다. 멕시코 원산의 고추가 중국과 일본을 거쳐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고, 한국의 특유의 장류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매운 장, 즉 고추장(辣醬)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고추장의 등장은 단순한 맛의 변화가 아닌, 식생활 철학의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고추장은 단백질과 탄수화물, 미네랄, 발효균이 모두 조화를 이루는 복합발효 식품으로, 조선 후기 농촌 사회의 저장음식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기존에는 간장과 된장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고추장을 활용한 음식은 저장성, 항균력, 열량, 풍미 등에서 뛰어난 장점을 보였기 때문에 급속히 퍼졌다.

이런 변화 속에서 순창 지역은 고추장 제조의 핵심지로 부상했다. 순창은 전통적으로 콩 농사가 활발했던 지역이었고, 일조량이 많아 고추 생산에도 유리했다. 게다가 전통적인 장 담그기 문화가 깊이 뿌리내린 농촌 공동체가 많았기 때문에, 고추장 제조에 필요한 인프라와 지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순창 고추장은 바로 이 환경에서 태어나고 발전하게 된다.

조선의 궁중 음식 속 고추장, 순창 고추장의 위상이 드러나다

조선 후기에는 고추장이 민간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궁중 음식의 조리 과정에서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시의전서(是議全書)』와 『진찬의궤(進饌儀軌)』, 『규합총서』 같은 조선 후기의 궁중 및 양반가의 조리서이다. 이들 문헌에서는 고추장을 활용한 국, 찜, 무침, 떡장 등 다양한 음식의 조리법이 등장하며, 일부 문헌에서는 고추장의 원산지나 제조법에 순창이라는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기도 한다.

『규합총서』에서는 “청량하고 신선한 고추장을 쓰되, 전라 순창에서 담근 것이 가장 순하며 오래 가도 변질이 적다”는 식의 문장이 실려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상류층 여성들이 쓰던 생활 백과사전으로, 그 안에서 순창 고추장의 품질이 언급된 것은 지역 특산물로서의 위상을 입증하는 매우 의미 있는 기록이다.

또한 왕실에서는 병조림이나 장아찌, 찜요리 등의 저장식 재료로 고추장을 활용했고, 조리용 재료 외에도 궁중 연향(宴饗) 때 지역 진상품으로 순창 고추장이 납품되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이는 조선 후기 들어 고추장이 단순한 민간 양념이 아니라, 궁중 식문화에도 자리 잡은 고급 조미료로 자리매김했다는 증거이다.

당시 순창 고추장은 색이 붉고 맛이 깊으며, 쓴맛과 떫은맛이 적은 ‘청정 장’으로 알려졌고, 이는 순창 고유의 토질, 물맛, 그리고 메주 제조 방식 덕분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처럼 순창 고추장은 조선의 식생활사에서 지역성과 품질, 그리고 문화적 가치까지 인정받은 장이었다.

순창 고추장을 만드는 전통의 방식과 장인들의 손끝 철학

순창 고추장이 오늘날까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역사적 기록 때문이 아니다. 이 지역의 고추장은 지금까지도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 제조법에 기반해 만들어지고 있으며, 장인들의 손끝에서 정성스럽게 빚어진 ‘삶의 장’이기 때문이다.

순창 고추장의 제조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메주를 띄우고, 엿기름과 고춧가루, 찹쌀풀, 천일염을 정해진 비율로 섞은 뒤,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마당에서 100일 이상 발효시킨다. 이 과정에서 미생물이 천천히 숙성되며 특유의 감칠맛과 항균 작용을 만들어낸다. 순창에서는 사계절 내내 햇살과 안개가 적절히 교차되는 기후가 이 발효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메주를 띄우는 방식도 지역마다 다르지만, 순창에서는 가문마다 전해 내려오는 방식과 발효 기간, 염도 조절법이 따로 존재하며, 이를 지키는 것이 장인의 자존심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전통은 국가무형문화재 지정 대상이 된 명인들이 보유하고 있으며, 실제로 순창 고추장 명인 제도는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순창 고추장은 일정한 농도와 향, 저장성, 건강성을 모두 갖춘 프리미엄 고추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처럼 순창 고추장은 단순히 ‘고추를 넣은 장’이 아니라, 지역의 자연 조건, 인문 환경, 식생활 철학이 결합된 총체적 발효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순창 고추장, 글로벌 발효식품으로 다시 태어나다

현대에 들어와 순창 고추장은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순창군은 2000년대 초반부터 고추장 산업 특화단지 조성, 전통 장류 산업 육성, 관광과 교육 프로그램 결합 등의 전략을 통해 순창 고추장을 지역 브랜드이자 국가 대표 발효식품으로 성장시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순창 고추장 민속마을’과 ‘장류체험관’이다. 이곳에서는 고추장을 직접 담그는 체험부터, 고추장과 관련된 민속 음식, 전통 장독대 관리법, 발효과학 체험 등 다양한 콘텐츠가 운영되고 있다. 이를 통해 순창 고추장은 먹는 전통을 넘어, 보고 배우는 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산업 측면에서도 순창 고추장은 국내 유통망을 넘어 미국, 일본, 동남아, 유럽 등지로 수출되고 있으며, ‘K-소스’ 열풍의 중심 아이템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채식주의자, 비건, 글루텐 프리 식단 등에 맞춰 개발된 새로운 형태의 순창 고추장은 전통과 현대의 균형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 꼽히고 있다.

문화재청은 2020년대 들어 ‘한국 장문화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추진 중이며, 이 과정에서 순창 고추장과 그 제조 기술도 핵심 사례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곧, 순창 고추장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발효 식품 문화의 상징이자, 미래 세대에게 전승되어야 할 가치 있는 문화유산임을 의미한다.

순창 고추장, 발효된 시간의 맛이자, 한국의 맛 그 자체

순창 고추장은 단지 매운맛을 내기 위한 양념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발효시킨 기억이고, 가정의 문화이고, 민족의 입맛이 집약된 결과물이다. 조선 궁중의 상차림에도 오르고, 지금은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는 이 고추장은 단일 음식 그 이상으로, 한국인의 정체성과 정신을 담은 문화 상징물이다.

이 고추장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을 대표하는 발효식품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장독대 앞에서 수백 번 저어가며 온기를 지켜온 어머니들의 손길과, 농부들의 땀방울, 그리고 지역이 지켜온 철학 덕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순창이라는 땅이 존재한다.

앞으로도 순창 고추장은 한국의 맛, 발효의 미학, 그리고 민속의 지혜를 세계에 전하는 붉은 대사(大使)로서의 역할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