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북 정읍 쑥, 동학농민군의 약초밥상에서 이어진 향기로운 전통

insight-2007 2025. 7. 24. 16:44

정읍의 땅이 길러낸 민초의 풀, 쑥

전라북도 정읍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전환점이 된 동학농민운동의 발상지이자, 풍부한 농업 생태계와 약초 자원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그중에서도 ‘정읍 쑥’은 오랜 세월 동안 향기로운 건강 식재료로, 민간약으로, 제례 음식의 재료로 활용되어 온 지역 대표 식물이다. 정읍의 쑥은 단순한 산야초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는 민중의 굶주림을 채우고, 병든 몸을 돌보던 ‘민초의 음식’이자 ‘약초’였으며, 지금은 웰빙 식품과 전통 힐링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약초밥상에서 이어진 전북 정읍 쑥

 

정읍은 지리적으로 내장산과 고부천, 동진강 등이 만나는 완만한 산지와 습지 지형을 갖추고 있으며, 이는 쑥의 생육에 매우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한다. 특히 내장산 자락에서 자라는 쑥은 향이 깊고 섬유질이 부드러우며, 약효 성분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조선 후기의 향토지 『호남읍지』에서도 정읍 지역의 ‘기양초(艾草)’가 약초와 제사 재료로 널리 쓰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정읍 쑥의 존재를 더욱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동학농민군과의 연결고리다. 1894년, 고부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을 들끓게 만든 동학농민운동은 이 땅의 농민들이 자신들의 삶과 땅을 지키기 위한 항쟁이었다. 당시 농민군은 싸움터를 떠돌며 쑥을 이용한 밥, 떡, 죽, 찜을 만들어 건강을 보충했고, 쑥은 병든 동지의 상처를 싸매는 데도 사용되었다. 이처럼 정읍 쑥은 민초의 약이자, 항쟁의 기억이 담긴 풀이다.

쑥의 기원과 한반도 전래, 정읍 쑥이 자라난 생태적 조건

쑥은 유라시아 전역에 자생하는 국화과 다년생 식물로, 한국에서는 ‘약쑥’, ‘들쑥’, ‘사철쑥’ 등 다양한 변종이 자생한다. 고대 문헌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도 쑥은 신화와 약초로 자주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단군신화 속 웅녀가 사람이 되기 위해 쑥과 마늘을 먹으며 100일간 동굴에서 수행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러한 쑥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약초이자 음식 재료, 제사 음식, 부인병 치료제, 부황재료, 향초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특히 『동의보감』에서는 쑥을 “기혈을 보호하고 차가운 기운을 제거하며, 자궁을 따뜻하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킨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쑥이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생리적·정신적 건강을 위한 전천후 약재로 취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정읍 지역은 이런 쑥이 가장 잘 자랄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 내장산 일대의 토양은 유기물 함량이 높고, 일교차가 크며, 수분 배출이 탁월하여 쑥 특유의 정유 성분이 잘 응축된다. 또한 봄철이 되면 강과 계곡 주변의 사질토 지대에 쑥이 대량으로 자생하며, 그 향과 빛깔이 탁월하여 예로부터 제사상과 궁중 찰떡 재료로도 납품되었다.

정읍에서는 특히 ‘내장산 쑥’과 ‘태인 들쑥’이 최고 품질로 평가되며, 일부 마을에서는 세시풍속에 따라 봄 첫 쑥을 채취해 마을 어른들에게 ‘쑥국밥’이나 ‘쑥전’을 대접하는 풍습도 존재했다. 이처럼 정읍 쑥은 단순히 들풀의 차원이 아니라, 세대 간의 전승, 제사, 치유, 생활을 아우르는 복합 문화 식물로 자리잡게 된다.

동학농민군의 밥상과 약상, 정읍 쑥이 지닌 항쟁의 기억

1894년 동학농민운동은 고부군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된 조선 민중사 최대의 항쟁이었다. 당시 농민들은 외세의 침탈, 조세의 수탈, 양반 중심 사회에 대한 분노 속에 봉기했으며, 정읍은 그 중심 무대였다. 농민군은 상비군 체제가 아닌, 농사짓다 모인 민병 조직이었기에, 식량 확보가 전쟁만큼 중요했다. 이때 많은 농민군이 봄철 들녘에서 자라는 쑥을 이용해 영양을 보충하고 건강을 유지했다.

정읍 쑥은 항쟁 당시 세 가지 방식으로 농민군의 생명을 지탱했다.
첫째, 쑥떡, 쑥밥, 쑥국 등으로 탄수화물과 섬유질을 보충했다. 쑥은 흔히 자라면서도 배탈이 없고 저장성이 뛰어나, 초근목피 시절의 필수 대체 식재료로 활용되었다.
둘째, 쑥은 상처 치유와 해열, 벌레 물림 치료에 응급약초로 쓰였다. 따뜻하게 덖은 쑥을 상처 부위에 얹거나, 쑥잎을 삶은 물로 세척하는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셋째, 일부 지역에서는 쑥을 향료나 제사 초로 사용하여 농민군의 정신적 안정과 의식 유지에 기여했다.

당시의 쑥 활용 사례는 정읍 향토사 연구자들과 구전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동학 유적지 인근의 마을에서는 ‘쑥밥을 지어 항쟁터에 나간 오빠를 배웅한 누이의 이야기’, 쑥 찜질로 말라리아에 걸린 동지를 살린 기록 등이 전승된다. 정읍 쑥은 단지 영양원이 아닌, 공동체의 저항 정신과 민초들의 생존 지혜가 응축된 상징이 된다.

오늘날에도 정읍에서는 3월 초가 되면 동학기념공원 인근에서 ‘쑥 축제’ 또는 ‘쑥 밥상 재현 행사’가 열리며, 이는 단순한 향토축제를 넘어서 역사적 기억을 재현하는 공동체 의례로 기능하고 있다.

정읍 쑥을 키운 전통 지혜와 오늘날의 지속 가능 농업

정읍 쑥이 단지 과거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도 정읍에서는 지역 공동체를 중심으로 유기농법, 재래종 보존, 친환경 약초 재배법 등을 통해 쑥을 재배하고 있으며, 이는 미래형 건강 식품 산업과 연결된 전통 농업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쑥은 외래 병충해에 강하고, 비료나 농약이 거의 필요 없는 식물이다. 정읍의 쑥 재배 농가들은 이를 활용하여 무경운(無耕耘), 무농약, 저탄소 방식의 지속 가능한 약초 농업을 실천하고 있으며, 이는 농촌 재생 모델로도 각광받고 있다.

전통 방식의 채취 또한 주목할 만하다. 정읍에서는 봄철 새벽 안개가 걷히기 전, 이슬에 젖은 쑥을 손으로 하나하나 채취한 뒤, 석쇠에 살짝 구워 말리는 방법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이 방식은 향과 성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효과가 있으며, 실제로 이 방식을 따르는 농가의 쑥은 프리미엄 약쑥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또한, 정읍 쑥을 활용한 현대 제품들도 주목받고 있다. 예를 들어 쑥 진액, 쑥차, 쑥 엑기스, 쑥팩 등 건강 기능성 가공품, 한방 여성용 좌훈제, 쑥 입욕제, 약선 음식점에서 제공되는 쑥밥, 쑥죽, 쑥떡 코스요리 등이다. 이러한 상품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으로, 정읍 쑥의 역사성과 치유력을 현대인에게 전달하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있으며, 지역 소득 창출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 정읍 쑥의 문화 가치와 세계화를 향한 움직임

정읍 쑥은 이제 과거의 항쟁 식재료가 아니라, 지역 문화유산이자 미래형 건강 콘텐츠로 재조명받고 있다. 순수 지역 품종 보존과 재배 기술의 전통 계승 외에도, 문화관광, 교육, 산업, 힐링 콘텐츠와 융합된 다양한 프로젝트가 정읍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정읍 약초 건강밥상 체험 마을’, 쑥 생태 해설 프로그램, 쑥 힐링 족욕 테라피 체험, 정읍 여성한방축제 등의 프로그램이 매년 운영되며, 쑥을 활용한 관광객 체류형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또한 정읍시에서는 ‘정읍 쑥 지리적 표시제 등록’, ‘쑥 품종 고도화’, ‘농촌 융복합 산업 인증’ 등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며 쑥 산업의 현대화·세계화 기반을 확대하고 있다.

국내외 웰빙 트렌드와 함께, 정읍 쑥은 미국·일본·프랑스 등지에 쑥차, 쑥가루, 쑥비누 형태로 수출되며, K-허브(Korean Herb)의 대표 브랜드로 성장 중이다. 특히 한방의학과 연계한 쑥 좌훈 제품은 여성 소비자를 중심으로 글로벌 헬스케어 시장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다.

정읍 쑥은 단순한 풀 한 포기가 아니다. 그것은 항쟁의 기억, 민중의 음식, 치유의 약초, 그리고 지역민의 정체성이 응축된 지속 가능한 지역 문화 자산이다. 이제 정읍 쑥은 과거를 기억하며, 동시에 미래로 나아가는 한국형 약초 산업의 상징이 되고 있다.

정읍 쑥, 항쟁과 치유, 그리고 향기의 역사

정읍 쑥은 들풀 같지만, 그 속에는 민중의 삶과 저항의 역사, 여성의 건강과 세시풍속, 그리고 약초 지혜의 유산이 살아 숨쉰다. 이 작은 식물이 품은 시간의 결은 단지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뿌리와 연결된 문화의 향기다.

과거엔 동학농민군의 밥상을 채우고 상처를 싸매던 쑥이, 오늘날엔 건강한 삶과 지역 경제, 관광 산업을 이끄는 현대형 전통 콘텐츠로 거듭나고 있다. 그 중심에는 늘 정읍의 땅, 사람, 전통, 그리고 자연이 함께 있었다. 정읍 쑥은 여전히 들판에서 자라고 있고, 그 향기는 이제 세계를 향해 피어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