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충남 예산 사과, 내포 천주교 순례길 따라 자란 붉은 신앙의 열매

insight-2007 2025. 7. 27. 13:27

내포의 신앙과 사과 한 알이 만들어낸 충절과 생명의 이야기

충남 예산은 한반도 중서부 내륙에 위치한 평온한 농촌 지역이지만, 그 땅 아래에는 조선시대 박해의 흔적과 신앙의 피눈물이 서려 있다. 내포 천주교 순례길은 이 지역에 흩어져 있던 천주교 순교지와 교우촌을 연결한 길로, 순교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이다. 그런데 이 신앙의 길을 따라 오늘날 전국 최고 품질로 평가받는 사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단순한 우연 이상이다. 고난 속에서도 생명을 지켜낸 이들의 흔적 위에서, 예산 사과라는 붉은 열매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상징적이다.

내포 천주교 순례길 따라 자란 충남 예산 사과

 

예산은 충남에서 보기 드문 고랭지형 분지지대와 내포 특유의 기후 조건을 갖춘 곳으로, 조선 후기부터 조용한 피난처이자 신앙공동체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그중에서도 사과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로 알려져 있지만, 이 지역의 사과 재배는 단순한 경제활동이 아닌 문화와 정체성의 상징물로 발전해 왔다. 예산 사과는 오랜 시간 동안 지역민의 삶을 지탱해준 생계수단이자, 내포 천주교 전통과 함께 영적 상징성을 지닌 자연의 열매로 자리잡고 있다.

이 글에서는 예산 사과가 자라온 역사적 배경, 신앙과 자연이 결합된 독특한 재배 환경, 조선과 근대의 기록 속 흔적, 그리고 오늘날 문화 콘텐츠와 수출 자원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총 4개의 문단으로 나누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사과 한 알이 단지 과일이 아닌, 신념과 생명의 기록임을 함께 증명해보고자 한다.

예산의 자연과 내포 신앙, 사과를 품다

충남 예산은 백제 시대부터 이어진 내포 문화권의 중심지로, 해발 100~300m 수준의 완만한 구릉과 분지가 조화를 이루는 지역이다. 특히 내포 지역은 여름철 강수량이 비교적 적고, 일조량이 풍부하며, 밤낮의 일교차가 커 사과 재배에 이상적인 환경으로 평가된다. 대부분의 충청 지역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데 반해, 예산은 기온과 강수량, 토양 특성상 과수 중심의 복합농업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예산이 사과 산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기에는 식량 정책의 일환으로 과수 재배가 장려되었고, 이 시기 예산군 봉산면, 신양면 일대에서 사과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예산의 사과는 ‘아오이’ 품종으로 알려졌고, 해방 이후에는 미국 품종인 ‘부사’, ‘홍옥’ 등이 도입되면서 품종 개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농업 기술보다 더 중요한 요소는, 이 지역 농민들이 사과 재배를 통해 가족과 마을 공동체의 생계를 꾸리고, 신앙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내포 지역은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피해 숨어든 교우촌이 많았고, 교우들은 논보다 덜 눈에 띄는 과수원을 가꾸며 생계를 이어갔다. 이들 중 일부는 사과밭을 돌보는 일을 공동체적 노동으로 여겼으며, 이를 ‘신의 뜻에 부합하는 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사과밭이 신앙의 삶터가 된 사례는 예산군 덕산면·신례원 일대의 교우촌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사과를 수확하면 제일 먼저 순교지에 바치고, 남은 열매로 겨울 양식을 준비하였다”는 구술 자료는, 사과 재배가 단순한 생계가 아닌 종교 공동체의 의례적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자연환경과 신앙, 공동체의 역사가 어우러진 예산 사과는 이처럼 지형적 조건뿐 아니라 정신적 기반에서도 특별한 유산이다. 단단하고 진한 단맛, 풍부한 과즙은 기후의 선물이지만, 그 열매를 맺기까지의 문화와 시간은 예산만의 깊은 스토리를 담고 있다.

예산 사과, 조선과 근대를 관통한 붉은 생명의 기록

예산 사과가 공식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시점은 조선 후기의 『여지도서』나 『동국여지승람』 같은 지리지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사과류 과실수 재배의 흔적은 분명하게 나타난다. 특히 예산군 지역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교우촌과 관련된 개인 문서나 사족가문의 가계 문서에서 사과나무와 관련된 기록이 간간이 등장한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사과밭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교회 기와를 고쳤다”는 식의 문장이나, “성물 구입은 가을 과일 수확 후에 할 것”이라는 지시가 문서 속에 남아 있다. 이런 내용은 예산 사과가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지역 신앙 공동체의 경제 기반이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예산의 사과 재배는 천주교의 박해와 맞닿은 역사적 배경과 함께 전개되었기에,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문화적 상징성을 갖게 된다. 조선 말기에는 산골짜기나 외진 구릉지에 공동체가 숨어들어 신앙을 지켰고, 그 장소들이 사과나무가 잘 자라는 환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내포 천주교 신앙의 흔적과 사과 재배지는 자주 겹친다.

근대기에 접어들면서 예산 사과는 점점 지역 특산물로 자리잡는다. 일제강점기부터 사과 품종이 도입되고, 1960년대 이후 정부의 원예농업 장려 정책에 따라 예산군은 사과 중심의 과수 지역으로 체계화된다. 1970년대 초에는 ‘예산 사과영농조합’이 설립되며 공동 출하 체계가 마련되었고, 1980년대에는 ‘홍로’ 품종을 중심으로 전국 유통망이 확대되었다.

특히 충남 사과의 대표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예산 사과’는 전국의 대도시 도매시장뿐 아니라, 서울 교구를 중심으로 한 천주교 단체의 선물용 과일로도 널리 사용되었다. 일부 수도회에서는 예산 사과 농가와 연계해 ‘신앙농법’을 계승하며, 사과를 믿음과 생명의 상징으로 포장한 마케팅도 시도하였다. 이는 예산 사과가 단순히 품질 좋은 과일이 아니라, 정신적 서사를 가진 특산물로 부각된 과정을 의미한다.

예산 사과의 산업화와 문화 콘텐츠화, 붉은 과일에 담긴 정체성

현대에 들어 예산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닌 지역 경제와 정체성, 그리고 문화 자산이 융합된 상징적인 특산물로 자리 잡고 있다. 사과는 이제 예산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농산물이자 브랜드이며, 농업에 머물지 않고 교육, 관광, 문화산업으로 확장되는 6차 산업형 콘텐츠로 발전하고 있다.

예산군은 일찍부터 사과 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해 지역 내 사과 전문 재배 단지를 조성하고, 품종 다양화 및 저장 기술 개선에 집중해 왔다. 특히 ‘예산사과연구회’, ‘예산군사과연합회’와 같은 농업인 조직이 중심이 되어 공동 재배, 공동 브랜드 관리, 공동 출하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를 통해 유통 경쟁력과 품질 신뢰도를 높이는 데 성공했다.

현재 예산 사과는 ‘홍로’, ‘부사’ 외에도 ‘아리수’, ‘감홍’, ‘피크닉’ 등의 다양한 품종이 재배되고 있으며, 각 품종은 맛과 향, 저장성, 당도 등 세분화된 기준에 따라 출하된다. 특히 예산 사과는 일반적으로 껍질이 얇고 색이 고르며 과육이 단단하면서도 과즙이 풍부한 특징을 가지며, 이는 예산만의 고랭지 환경과 전통적인 재배 노하우 덕분이다.

또한 예산군은 사과를 중심으로 한 지역축제와 관광 콘텐츠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매년 가을에 열리는 ‘예산 사과축제’는 단순한 농산물 판매 행사를 넘어서, 지역 문화와 농촌 체험, 역사 교육을 결합한 종합형 문화축제로 자리 잡았다. 축제에서는 사과 따기 체험, 사과로 만든 다양한 먹거리 시식, 사과 조각 전시, 사과 캐릭터 굿즈 판매 등 사과를 소재로 한 다채로운 활동이 이루어지며, 가족 단위 관광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내포 천주교 순례길과 사과밭을 연계한 관광 코스는 지역 문화와 신앙적 의미를 동시에 체험할 수 있는 이색 콘텐츠로 주목받고 있다. 관광객들은 성지순례길을 따라 걷다가 순례지 인근의 사과농장에서 직접 사과를 따고, 예산의 순교자 유적지와 자연 풍광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구조다. 이는 정신적 체험과 오감 만족형 체험을 결합한 고유 관광모델로, 다른 사과 산지와 차별화된 점이다.

이 밖에도 예산에서는 사과를 활용한 다양한 가공품 생산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사과즙, 사과잼, 사과 말랭이, 사과초(발효식초), 사과와인 등으로 가공된 제품들은 ‘예산사과’ 브랜드로 통합 포장되어 전국 유통망에 진출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무설탕·유기농 콘셉트로 건강식품 시장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일부 제품은 ‘사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예산을 경험하는 것이다’라는 슬로건으로 브랜드 스토리텔링 마케팅을 강화하고 있다.

예산 사과는 이렇게 단순한 농산물을 넘어, 사람들의 기억, 공동체의 삶, 지역의 역사, 종교적 정신까지 담아낸 하나의 문화 아이콘으로 성장하고 있다. 한 알의 사과 속에는 자연의 은혜뿐만 아니라, 이 지역 사람들의 신념과 공동체 정신이 켜켜이 들어있다.

세계로 향하는 예산 사과, 생태농업과 신앙 유산이 만드는 미래 가치

예산 사과는 지금도 단단하고 고운 색의 과일로만 평가받지 않는다. 그 안에는 지속가능한 농업과 신앙의 유산, 그리고 지역 정체성을 보존하면서 세계로 뻗어가는 문화 브랜드로의 진화 가능성이 깊이 내재되어 있다. 전 세계적으로 친환경 농산물, 슬로푸드, 지역문화 연계 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예산 사과는 새로운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예산군은 최근 몇 년간 무농약·저농약 재배 농가를 중심으로 해외 수출 확대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권 고급 마켓에서 예산 사과는 ‘한국의 프리미엄 과일’로 포지셔닝되었고, 일부 품종은 유기농 인증을 획득해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건강식 전문 유통 채널에 입점되기도 했다. 이는 단순한 수출이 아니라, 예산 사과가 지닌 ‘깨끗한 자연’, ‘사람 중심 농업’, ‘스토리가 있는 과일’이라는 브랜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문화 수출이다.

예산군은 또한 사과농업의 지속가능성 확보를 위해 농약 사용 저감 기술, 토양개량제 보급, 탄소저감형 포장재 도입 등 다양한 생태농업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는 기후 위기 시대의 필수 과제로 떠오른 ‘지속가능한 먹거리 시스템’에 부합하는 구조이며, 예산 사과가 단지 지역 농산물이 아닌 글로벌 친환경 농업 모델로 진화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예산 사과는 내포 천주교 순례길과의 결합을 통해 ‘신앙의 상징성’을 가진 특산물로 차별화되는 가능성을 갖는다. 순례길을 걷는 이들에게 제공되는 ‘신앙의 사과’, ‘순례자의 열매’라는 개념은 단지 종교적 메시지에 머무르지 않고,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는 소비재로의 발전 가능성을 가진다. 이는 세계적으로도 주목받는 윤리적 소비, 가치 기반 소비문화와도 궤를 같이한다.

현재 예산군은 천주교 교구와 협업해 ‘예산 사과+신앙 콘텐츠’ 패키지 개발을 검토하고 있으며, 천주교 관련 관광지 및 순례 상품과 연계된 사과 선물세트, 사과 테마 기념품 등의 출시도 논의되고 있다. 일부 수도회에서는 수도자들이 직접 사과를 키우고, 수확하며 가공하는 작업을 수행하면서, 노동과 믿음이 결합된 현대 농수도생활의 실천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궁극적으로 예산 사과는 단지 ‘맛있는 과일’로 소비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 알의 사과를 통해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지, 그리고 공동체가 어떻게 신념을 지키고 전통을 계승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과일이다. 그것이 바로 ‘예산 사과’가 여느 사과와 구별되는 이유다.

세계 어디서든 그 과일을 맛보는 순간, 사람들은 단지 달고 아삭한 과일이 아니라, 충남 예산이라는 땅, 내포 신앙의 역사, 그리고 순수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