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김천 자두, 일제강점기 개간 농민들이 심은 새콤달콤한 저항의 맛
억압의 땅에서 자라난 단맛, 김천 자두가 품은 민초의 역사
경북 김천은 오늘날 ‘자두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 과일이 처음 심어진 시점은 단순한 농업의 시작이 아니었다. 바로 일제강점기, 땅을 잃고 삶을 빼앗긴 조선 농민들이 스스로 개간한 땅에 심은 열매였다. 자두 한 알이 단지 새콤달콤한 과일에 그치지 않고, 가난과 억압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저항의 기록이자, 생존을 위한 농민의 결기였다는 사실은 지금의 김천 자두를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김천은 경북 내륙의 산간 지역으로, 척박한 구릉지와 낮은 산자락이 많은 지형이다. 일제는 이러한 땅을 ‘미개간지’로 분류하고 조선 농민들에게 강제로 농지 개간을 시키거나, 일본인 지주의 관리하에 헐값에 수탈했다. 그러나 일부 농민들은 버려진 구릉지와 산자락을 스스로 개간하여, 벼농사 대신 과일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가 바로 자두나무였다.
이 글은 김천 자두가 어떻게 일제강점기의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희망과 생존의 상징으로 자라났는지, 그리고 오늘날에는 어떻게 지역 브랜드로 성장했는지를 총 4개의 문단을 통해 다룬다. 김천 자두는 단지 과일이 아닌, 억압에 맞서 삶을 개척한 농민의 땀과 의지가 맺은 붉은 결실이다.
개간지 위의 씨앗, 김천 자두의 뿌리는 저항이었다
김천이 자두 주산지로 거듭나기까지는 단순한 농업 기술이나 기후 조건의 영향만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일제강점기의 착취와 억압 속에서도 땅을 일구고 삶을 지켜낸 조선 농민들의 피나는 개간과 자립의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1920~30년대 일제는 전국 곳곳에 일본인 지주와 자본을 침투시켜 식민지 경제를 강화했다. 김천 지역 역시 이 영향권 안에 있었으며, 많은 토지는 일본인 명의로 강제 이전되거나 수탈되었다. 당시 조선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버려진 구릉지나 경사지를 중심으로 스스로 개간지를 만들어 생계를 이어갔고, 벼농사가 어려운 토질과 물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과수재배로 눈을 돌렸다.
자두는 특히 척박한 토양에도 잘 자라며, 병충해에 강하고 생육 속도가 빠르다는 특성 덕분에 단기 수확이 가능한 작물로 주목받았다. 1930년대 김천 지역에서는 이러한 조건을 바탕으로 일부 농가들이 자두나무를 시범적으로 심기 시작했고, 이내 주변 지역으로 확대되며 자생적 과수지대가 형성되었다. 일부 자두는 민간 유통망을 통해 대구, 대전 등지의 장터로 흘러갔고, 초기에는 소득이 크지 않았지만, 재배 노하우가 축적되며 점차 소규모 독립농가의 주요 소득원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 자두는 농민 스스로의 손으로 개간한 땅에서 자란 최초의 생계작물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수확된 자두는 단지 먹거리 그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자립의 상징이자, 외세와 착취에 맞서 삶을 지켜낸 민초의 상징이었다. 당시 농민들 사이에서는 “자두는 단맛에 가려진 눈물의 과일”이라는 말까지 나돌았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해 자두밭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 조직이 모임을 갖는 사례도 있었다는 구술자료도 일부 전해진다.
이처럼 김천 자두는 단순한 특산물이 아니라, 억압받은 땅 위에서 스스로 삶을 일군 사람들의 결기와 의지가 깃든 생명의 산물이다. 그 뿌리는 단맛이 아닌, 저항과 자립이라는 가치를 품고 있다.
김천 자두, 해방 이후에도 이어진 민중의 과일
해방 이후에도 김천 자두는 여전히 서민과 농민의 과일로서 자리를 지켜냈다. 1950~60년대, 한국전쟁과 산업화 초기의 혼란 속에서도 자두 재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농업 형태로 유지되었고, 특히 김천의 자두는 점차 품질의 우수성과 재배 경험의 누적을 통해 전국적인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김천의 자두 재배지는 대부분 산지와 완만한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물빠짐이 좋고 병충해가 적은 재배 환경을 갖추고 있다. 게다가 김천은 일교차가 크고 여름 햇볕이 강한 지역 특성상 당도와 산미가 동시에 살아나는 과일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후적 강점과 농민들의 오랜 경험이 결합되면서, 김천 자두는 1980년대에 들어서 대구, 부산, 서울 등 대도시 도매시장에서도 ‘맛있는 자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4년에는 김천시 농업기술센터와 자두재배 농민들이 함께 ‘김천 자두연합회’를 결성하며 품질 표준화와 공동 출하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이 시기부터 ‘김천 자두’라는 지역명 브랜드가 점차 확립되었고, 홍로, 추희, 대석 등 다양한 품종의 자두가 안정적으로 생산되고 유통되기 시작했다. 김천 자두는 크기가 크고 과육이 단단하며, 씹을수록 새콤달콤한 맛이 강하게 느껴지는 특징으로 소비자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90년대에는 자두 축제가 시작되었고, 김천 자두는 도시 브랜드와도 연결되기 시작했다. 단순한 농산물 생산에서 벗어나 김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농산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시기 김천시는 자두 관련 가공품 산업에도 적극 투자하여 자두즙, 자두잼, 자두 말랭이 등 부가가치 높은 제품군을 육성했으며, 이는 자두 산업의 안정성과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김천 자두가 단지 “맛있는 과일”이라는 평가를 넘어, 민중의 삶과 직접 연결된 과일이라는 정체성을 이어왔다는 점이다. 자두밭은 단순한 생산 공간이 아니라, 마을 공동체가 함께 일하고 나누는 삶의 현장이었고, 그 속에서 자두는 다시 한 번 연대와 생존의 상징이 되었다.
산업으로 꽃핀 김천 자두,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으로
김천 자두는 2000년대에 접어들며 단순한 농산물을 넘어 지역 경제를 이끄는 전략 품목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김천시는 농업정책의 방향을 전환하며 “고부가가치 특화 작물 중심의 6차 산업화 모델”을 추진했고, 그 중심에 바로 자두가 있었다.
김천 자두의 가장 큰 강점은 타 지역 자두와는 다른 뚜렷한 품질 특성이었다. 해발 200~400m의 구릉지와 산간지역에서 재배되는 김천 자두는 일교차가 크고 일조량이 풍부해 당도가 높고 산미가 깔끔하며 과육이 단단한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품질 특성은 소비자들의 선호를 끌어냈고, ‘김천 자두’라는 지역 브랜드는 전국 도매시장에서도 고급 자두의 대명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김천시는 자두 재배 농가와 협력하여 품종별 수확 시기 조정, 공동 선별 및 포장 기준 도입, 온라인 유통 시스템 구축, 농산물우수관리(GAP) 인증 확대 등 다각적인 산업기반 조성에 힘썼다. 현재 김천은 자두 생산량 전국 1위 수준이며, 연간 5,000톤 이상의 자두가 생산되어 전국 각지로 유통된다.
산업적 성장과 함께 김천 자두는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의 확장도 함께 이뤄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매년 6~7월 개최되는 ‘김천 자두축제’이다. 이 축제는 단순한 농산물 판매행사를 넘어 자두 따기 체험, 자두요리 경연대회, 전통 복식 퍼레이드, 지역 예술 공연
등을 결합한 종합 문화 관광 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축제에서는 ‘자두 해방 밭길 걷기’와 같이, 일제강점기 개간지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체험 행사도 운영된다. 이 행사는 관람객들에게 단순히 자두를 먹는 경험이 아니라, 그 자두가 자라온 땅의 역사와 농민의 정신을 느끼게 해주는 교육적 프로그램으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김천시는 자두 관련 가공산업도 적극 육성하고 있다. 자두청, 자두 와인, 자두 발효 음료, 자두 화장품 원료 등 다양한 제품이 김천 농업기술센터, 지역 기업, 청년창업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두를 활용한 저칼로리 건강 간식, 유아용 퓨레, 천연 발효주 등의 제품도 개발되면서 프리미엄 가공식품 시장으로도 진출하고 있다.
자두는 또한 김천시의 도시 이미지 및 지역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콘텐츠가 되었다. 김천시청, 김천역, 각종 공공시설에는 자두를 형상화한 조형물이나 벽화가 설치되어 있으며, 지역 초·중학교에서는 ‘자두의 역사와 지역 정체성’을 주제로 한 교육 프로그램도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김천 자두는 단순한 농업의 범주를 넘어, 산업·교육·문화가 결합된 지역 자산으로 성장하고 있다.
세계로 향하는 김천 자두, 저항의 상징에서 글로벌 유산으로
김천 자두는 지금도 농민의 손에서 자라고 있지만, 이제는 국내를 넘어 세계인의 입맛과 감성을 사로잡는 한국의 대표 과일 브랜드로 거듭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지 수출 통계의 성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문화적 확장성을 동반한 진화이다.
2020년대 들어 김천시는 자두 수출 전략 품목화를 본격 추진했다. 농가 단위 GAP 및 유기 인증 확대, 저탄소 포장재 개발, 해외 홍보용 브랜드 리디자인, 자두 기반 건강식품 수출 패키지화 등의 정책이 추진되었고, 그 결과 현재 김천 자두는 홍콩, 싱가포르, 태국,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권에서 인지도를 높이고 있으며, 일부 품종은 미국, 캐나다, 중동 프리미엄 마켓에도 진입했다.
특히 ‘저항의 열매’, ‘생존의 상징’이라는 서사를 스토리텔링에 접목한 마케팅 전략은 해외 시장에서도 높은 반응을 얻고 있다. “이 과일은 단맛만 남긴 게 아니라, 과거를 견뎌낸 땀과 결기가 담긴 과일입니다”라는 슬로건은 김천 자두를 단지 과일이 아닌, 경험이자 철학으로 포지셔닝하게 만들었다.
세계 시장은 이제 단순한 영양소보다도 ‘스토리가 있는 음식’, ‘정신을 담은 브랜드’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김천 자두는 바로 이런 흐름에 가장 적합한 한국산 농산물 중 하나다. 단맛, 신맛, 씹는 식감만으로 승부하지 않고, 역사와 공동체의 이야기를 함께 전달하는 콘텐츠형 농산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또한 김천 자두는 민중 농업 유산으로서의 가치도 인정받기 시작하고 있다. 국내 학계와 농업유산 보존단체에서는 김천 자두 재배지를 일제강점기 자생적 개간지, 민간 저항의 장소, 자두 재배 문화의 발원지 등으로 지정하고, ‘농업문화 유산’ 등록을 추진 중이다. 이는 단지 식량 생산지로서의 가치를 넘어서, 삶과 저항, 생존과 공동체의 기록이 담긴 공간으로서의 재해석이다.
현재 김천시는 자두 유산 스토리센터 조성 사업도 추진 중이며, 이곳에서는 자두 역사 전시, 농민 구술 자료 보관, 자두 음식 체험, 다큐멘터리 영상 상영 등을 통해 김천 자두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함께 체험할 수 있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구성할 계획이다.
궁극적으로 김천 자두는 단지 과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가장 힘든 시기에 선택한 열매였고, 그 땅을 스스로 일군 사람들의 삶과 저항, 그리고 단맛에 가려진 역사가 담긴 과일이다. 이제 김천 자두는 그 역사를 세계에 알릴 준비가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