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제주 마농(마늘), 돌밭에서 자라는 생명의 뿌리 이야기

insight-2007 2025. 6. 30. 10:20

왜 제주 마농(마늘)은 ‘돌밭의 뿌리’라 불리는가?

제주도는 많은 사람이 아름다운 풍경과 관광지로 기억하지만, 실제로 이 섬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다. 검고 단단한 화산석이 흙보다 더 많은 밭, 거센 바람과 적은 강수량, 얕은 토양. 그러나 바로 이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난 작물이 있다. 바로 제주 마늘이다.

돌밭에서 자라는 제주 마농(마늘)


제주 마늘은 작은 덩이지만, 그 속에 담긴 맛과 향은 강하고 깊다. 그리고 그 단단함은 수백 년간 제주 사람들의 생계와 건강, 제사와 믿음을 함께 지켜온 뿌리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는 제주 마늘이 건강식품이나 고급 농산물로 주목받고 있지만, 그 시작은 조선시대 이전, 민초들의 손과 땀, 그리고 돌을 이겨낸 지혜에서 출발했다.
이 글에서는 제주 마늘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삶과 어우러졌고, 왜 지금까지도 제주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농작물로 남아 있는지를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이어진 마늘 재배의 시작과 제주 토양의 특성

제주도에서 마늘이 재배된 것은 고려 말 혹은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제주에서 ‘마늘을 포함한 뿌리 채소류’가 재배되고 있다는 기록이 등장하며, 『탐라지』와 『동국여지승람』에도 마늘이 제주민들의 주요한 식재료로 사용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제주에서 마늘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제주의 독특한 토양 구조 때문이었다. 화산 분출로 만들어진 현무암과 송이토(통기성과 배수가 뛰어난 화산성 흙)는 일반 농작물에는 불리했지만, 마늘처럼 뿌리를 깊게 내리지 않는 작물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제주의 밭은 대부분 ‘돌밭’이라 불리는 형태로, 마늘을 심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 손으로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야 했고, 다시 그 돌로 밭담을 쌓아야 했다. 이 밭담은 바람을 막고 습기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하며, 마늘이 안정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왔다.
즉, 제주 마늘은 단지 자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돌을 이겨내며 만들어낸 인공의 자연이었던 셈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제주가 마늘의 주요 산지로 떠오르며, 도민들이 마늘을 주요 소득원으로 삼기 시작했고, 마늘은 세금과 공물의 일부로 바쳐지기도 했다. 『제주목지』에 따르면, “마늘과 파는 백성들이 자급하며 일부는 관에 납부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마늘이 단순한 조미료를 넘어 생계와 행정의 재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간 약재이자 제례 음식, 제주 마늘에 담긴 믿음과 치유의 문화

조선시대 제주 마늘은 식재료일 뿐 아니라 민간요법에서의 활용도가 매우 높았던 약용 식물이었다. 『동의보감』에서는 마늘이 “기운을 돋우고, 장을 따뜻하게 하며, 독을 풀고, 기생충을 없앤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는 기후가 따뜻해 풍토병과 장내 질환이 빈번했던 지역이었고, 마늘은 그런 병을 예방하고 치유하는 ‘가정 약초’로 여겨졌다. 특히 감기기운이 있거나 속이 더부룩할 때 마늘즙이나 마늘차를 끓여 마시는 풍습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또한 마늘은 제례와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주에서는 조상에게 바치는 음식 중 일부로 마늘을 빠뜨리지 않았고, 마늘은 ‘악귀를 쫓고 기운을 맑게 한다’는 의미로 제사상에 올렸다. 장례식 전에도 마늘을 집 앞에 두어 잡귀의 침입을 막는 풍속이 있었으며,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갈 때 마늘을 바구니에 담아 보낸 경우도 있었다. 이는 다산과 장수, 부정 방지의 의미를 담은 상징적 행위였다.

마늘은 제주 여성의 삶과도 밀접했다. 밭일을 도맡아 하던 여성들은 겨울이 되면 마늘을 심고, 이듬해 초여름까지 매일 새벽밭으로 나가 풀을 매고 마늘대를 세웠다. 이 모든 과정은 한 사람의 노동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함께했던 공동체적 농사 방식이었다. 마늘은 그렇게 제주의 ‘공동 기억’으로 남았다.

제주 마늘 산업의 현대화와 지역 브랜드화의 시도

1970년대 이후, 제주 마늘은 본격적인 상업작물로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남도종’ ‘홍산종’ 등 내륙에서 들여온 마늘 품종이 섞이면서, 제주 토종 마늘의 보존과 품질 차별화가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제주시, 서귀포시를 중심으로 ‘제주 마늘 지리적 표시제’ 등록과 함께 품종 보존 사업이 추진되었고, 현재는 ‘제주 토종 마늘’과 ‘제주육쪽마늘’이 브랜드화되어 유통되고 있다.

또한 마늘을 활용한 다양한 2차 가공품이 등장하면서 산업 범위가 확장되었다. 마늘즙, 마늘환, 흑마늘 제품뿐 아니라 마늘을 활용한 건강 간식, 양념장, 된장, 디저트류까지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고 있으며, 일부 기업은 해외 수출까지 도전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제주 마늘이 단지 전통 농작물에 머무르지 않고, 건강과 기능성을 중심으로 한 현대 식품 트렌드 속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진 작물임을 보여준다.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도 마늘은 여전히 ‘가장 제주다운 작물’로 여겨진다. 매년 열리는 ‘제주 마늘축제’에서는 밭담 체험, 마늘 요리 경연, 전통 방식 수확 재현 등 마늘을 주제로 한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리며, 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 마늘의 역사와 가치를 체험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된다.

돌을 이겨낸 뿌리, 제주 마늘에 담긴 생명과 사람의 이야기

제주 마늘은 단지 섬의 특산물이나 음식 재료가 아니다. 그것은 돌밭을 가르고 뿌리내린 생명력의 상징이며, 사람과 자연이 오랜 시간 공존하며 만들어낸 문화의 결정체다.
제주의 땅은 언제나 거칠었고, 바람은 언제나 강했지만, 그 속에서도 마늘은 해마다 뿌리를 뻗고 새순을 틔웠다. 그리고 그 마늘을 키워낸 사람들 역시, 땀과 지혜로 한겨울부터 초여름까지 땅을 일구며 생계를 이어갔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마늘 한 쪽에는 그 모든 이야기가 스며 있다.
조상의 약으로, 가족의 밥상으로, 제사의 정성으로, 여성의 노동으로 이어져온 제주 마늘은 작은 크기와는 달리 제주 삶의 한가운데를 단단히 지탱해 온 뿌리이자 정신이다.

바위보다 강한 뿌리, 바람보다 깊은 생명.
제주 마늘은 단지 돌밭에서 자란 작물이 아니라, 사람의 손과 계절, 문화와 땀이 함께 만든 살아 있는 기록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