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충북 영동 포도, 일제강점기에도 일본 왕실로 수출된 이유는?

insight-2007 2025. 6. 30. 22:31

일제강점기에도 ‘왕실 납품’이 된 충북 영동 포도, 그 배경은?

한국에서 ‘포도’라 하면 대부분 충북 영동을 떠올린다.
그 중에서도 영동 포도는 단지 과일이 아니라, 역사와 시대를 담은 특산물이다.
지금은 고품질 포도와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지만, 그 명성의 뿌리는 생각보다 훨씬 깊다.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억압과 수탈의 시대 속에서도 영동 포도는 일본 왕실에 납품될 정도로 그 품질을 인정받았던 유일한 한국산 과일 중 하나였다.

일제강점기 일본 왕실로 수출된 충북 영동 포도


왜 하필 영동이었을까?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이 지역의 토양, 수로, 품종, 그리고 사람들의 지식과 기술, 무엇보다 포도 한 송이를 키우는 정성과 역사적인 조건들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결과였다.
이 글에서는 충북 영동 포도가 어떻게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쳐 왕실 수출품이 되었는지, 그리고 그 역사적 의미를 중심으로 조명한다.

포도의 전래와 영동의 기후, 조선 후기에 시작된 포도 재배의 뿌리

한국에 포도가 처음 전래된 시기는 통일신라 혹은 고려 초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재배가 확산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충청도 내륙지방을 중심으로 포도 재배 기술이 정착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북 일대에서 포도가 재배되고 있다는 간접적인 기록이 등장하고, 『동국여지승람』과 『여지도서』 등에는 "영동, 옥천 일대의 포도 맛이 좋고 알이 크다"는 언급이 있다. 이는 이미 18세기 후반 충북 영동 일대가 포도 재배의 중심지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영동은 산과 강이 조화를 이루는 분지형 지형으로, 낙동강의 상류 물길과 지하수 유량이 풍부하고, 일조량이 많으며 일교차가 크다. 이러한 조건은 포도 재배에 매우 유리한데, 당도가 올라가고 병해충이 적은 자연환경 때문이다.
특히 영동의 점질사양토는 배수가 뛰어나고, 포도 뿌리가 깊이 뻗을 수 있어 과실의 크기와 껍질의 질감, 향의 농도 모두에서 우수한 품질을 생산할 수 있는 이상적인 토양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가문이나 서당을 중심으로 포도를 약용이나 제사 음식으로도 활용하였고, 종종 고급 손님을 대접할 때 포도를 건포도나 초절임 형태로 제공한 기록도 전해진다.
이렇듯 영동 포도는 단순한 재배작물이 아니라, 조선 지식인 계층이 즐기던 과일로 천천히 정착해 간 품목이었다.

일제강점기, 영동 포도의 품질이 ‘왕실 수출’로 이어진 배경

1900년대 초 일제는 한반도의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농산물 품질 및 생산지에 대한 집중 조사를 시행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띈 것이 바로 영동 지역의 포도였다.
1910년 이후 일본 정부는 한국산 고품질 과일 중 일본 내 왕실·귀족 공급용으로 적합한 품목을 선별했고, 영동 포도는 일본 내 도쿄 귀족가의 납품 리스트에 실제로 올라간 몇 안 되는 한국산 과일 중 하나가 되었다.

『조선총독부 농업보고서(1923)』에는 영동 지역 포도에 대해 “알이 단단하며 과피가 얇고 당도가 뛰어나 일본산보다 우수하다”는 기술이 있고, 『조선과수조사서』(1930)에는 “영동군 황간면, 매곡면, 용화면 일대에서 생산된 포도는 전량 경성역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된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는 단순히 지역 특산물이 일본으로 넘어간 게 아니라, 국가급 품질로 평가된 유일한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 것이다.
다만 이런 영예 뒤에는 영동 주민들의 노동력 착취와 생산 강제 증가, 시장 가격 통제 같은 어두운 이면도 존재한다.
포도가 왕실에 수출되는 동안, 지역 농민은 낮은 가격에 수매당하거나 계약재배의 형식으로 생산물에 대한 자율권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동 포도는 그 품질을 유지했고,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적 환경에서도 명성을 잃지 않은 몇 안 되는 작물로 기록되었다.

포도 품종의 계보와 영동 농민의 품질 유지 노력

영동에서 재배된 포도는 당시 유럽계 ‘캠벨얼리(Campbell Early)’ 품종이 대부분이었고, 자연적 교잡과 지역 적응을 통해 한국형 캠벨 포도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품종은 추위에 강하고, 조생종으로 빠르게 수확이 가능해 전국으로 확산되었지만,
영동에서는 이 품종을 지속적인 품질 선별과 전통 재배 방식 유지를 통해 타 지역보다 훨씬 높은 당도와 저장력을 유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동의 포도 재배 농민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수탈의 위험 속에서도 토양 관리, 덩굴 유인 방식, 수분 조절, 일조량 관리 등 기술적 노하우를 계승하며 포도의 맛을 지켜냈다.
영동에서는 포도나무를 돌보는 일을 단순히 ‘농사’라고 부르지 않고 “포도 기른다”라고 표현했으며, 이는 작물이 아니라 사람처럼 정성을 쏟아 돌본다는 농민의 의식을 반영한 말이었다.

그 결과, 해방 이후에도 영동 포도는 서울·대전·부산의 고급 과일 상점에 먼저 납품되는 브랜드 과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일부 종가는 포도를 제사상에 올리는 전통을 유지했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당시 고귀한 음식이라는 인식이 지역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영동 포도 산업, 근대 농업의 자부심으로 이어지다

현재 영동은 전국 최대 규모의 포도 재배지 중 하나이며, ‘영동 포도’와 ‘영동 와인’이라는 지역 브랜드는 국내 프리미엄 과일 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가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의 품질 인증과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통해, 영동 포도는 단지 과일이 아니라 근대 농업 유산과 지역 정체성의 결합물로서 가치가 더욱 높아지고 있다.

또한 영동에서는 매년 ‘영동포도축제’가 개최되어, 수확 체험, 전통 포도즙 만들기, 와인 시음, 포도 요리 시연 등 다양한 행사가 펼쳐진다.
특히 최근에는 캠벨얼리 외에도 샤인머스캣, MBA, 거봉 등 고급 품종을 중심으로 품종 다각화가 이뤄지고 있으며, 영동군은 이를 바탕으로 와인 산업과 농촌관광, 청년 창업을 결합한 ‘6차 산업 모델’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이제 영동 포도는 일제강점기의 수출품이라는 과거를 딛고, 한국의 대표 과일이자 세계 시장을 향해 나아가는 문화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 뿌리에는 여전히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시간을 견디며 품질을 지켜낸 농민들의 손길, 그리고 그 땀방울로 피어난 한 송이의 품격이 자리 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