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구기자, 단순한 열매가 아닌 고려의 보약
한국의 약초 가운데 ‘구기자’는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고대부터 귀하게 여겨진 대표적인 보양 열매다. 특히 전라남도 진도에서 자라는 구기자는 색이 붉고 윤기가 흐르며, 맛이 달고 씹는 결이 곱다는 평가를 받아오고 있다.
오늘날에는 차, 즙, 환 등 다양한 가공식품으로 소비되고 있지만, 진도 구기자의 진짜 가치는 그 뿌리를 고려시대에 왕실 약재로 사용되던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한다.
진도는 단순한 재배지가 아니다. 기후와 토양, 해풍과 바닷물, 그리고 약초를 다뤄온 오랜 민간의 지식이 어우러진 천연 약초의 보고(寶庫)다.
이 글에서는 전남 진도에서 구기자가 어떻게 재배되었고, 왜 고려시대부터 약재로 사랑받았으며, 오늘날까지 어떤 전통과 가치를 이어오고 있는지를 역사와 문화의 관점에서 풀어본다.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구기자의 기록과 약재로서의 위상
구기자는 원래 중국의 한방 고전 『본초강목』에서 “간(肝)을 보호하고 눈을 밝히며 수명을 연장한다”고 소개된 약초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자생해왔다고 전해진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본격적인 약재 체계가 정비되면서, 구기자는 고려 왕실과 고위 승려들 사이에서 널리 애용되었던 약초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고려사』에는 “궁중의 내의원에서 구기자차를 매일 아침 탕전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향약집성방』에서는 “구기자는 간을 보하고 눈을 밝히며, 늙지 않게 하는 열매”라고 설명되어 있다. 특히 ‘사시불감(四時不減)’ 즉, 사계절 내내 몸에 이로우며 독성이 없다는 점에서 매우 귀하게 여겨졌다.
이 시기, 전남 진도는 이미 약초의 자생지로 주목받고 있었다. 고려 후기 불교의 중심지였던 대흥사(지금의 해남)와 연계된 남해안 지역 승려들이 진도 구기자를 탕약에 활용했다는 구술 자료와 사찰 문헌이 일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진도의 토질은 모래와 진흙이 섞인 사양질로, 수분 배출과 통기성이 뛰어나 구기자 뿌리 생육에 이상적이었고, 해풍이 불어 약초의 생리활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진도 구기자의 품질은 고려시대부터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진도 구기자의 자연 조건과 생육 특성, 왜 품질이 다른가
진도는 한반도 남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섬으로, 연평균 기온이 따뜻하고 일조량이 많으며, 해풍의 염분이 토양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반건조 해양성 기후대에 속해 있다.
이런 기후는 구기자의 성장에 매우 적합하며, 특히 봄철 생육기부터 가을 수확기까지의 긴 온도 편차와 풍부한 햇빛이 구기자의 당분 함량을 높이고, 색과 향을 진하게 만들어준다.
진도 구기자는 자생력과 병충해 저항력이 강하며, 타 지역에 비해 과피가 얇고 속이 단단해 건조 후에도 형태가 잘 유지된다. 또한, 함유된 베타인·루틴·비타민C·사포닌 등의 성분이 일반 구기자보다 높다는 연구 결과도 발표된 바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진도 구기자는 ‘약재형 구기자’로 분류되며, 식용보다는 건강 보조용, 약용 중심으로 유통되어 왔다.
전통적으로 진도 주민들은 구기자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가정 내 상비약처럼 활용해왔다.
구기자차는 어른들의 아침 상차림에 빠지지 않았고, 출산 후 산모에게 구기자죽을 끓여 먹이는 풍습이 있었으며, 감기나 눈병이 있을 때 구기자탕을 달여 마시는 식으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구기자는 진도에서 약초이자 일상식, 민속이 결합된 생활 약초로 존재해온 셈이다.
구기자에 담긴 민간요법과 사찰 식문화의 흔적
고려와 조선의 사찰문화에서는 구기자를 단순한 약재가 아닌, 수행과 치유를 동시에 위한 ‘선식(禪食)’의 일부로 여겼다. 진도 지역에서도 구기자를 건조해 차로 마시거나, 말린 구기자를 미음에 갈아넣어 묵언 수행 중 기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이는 조선 후기 『산림경제』에도 “선인들이 구기자를 복용하면 잡념이 사라지고 기혈이 순환된다”는 표현으로 간접적으로 남아 있다.
진도 구기자는 제례 음식으로도 사용되었다. 특히 구기자 숙채, 구기자 조림, 구기자 찜 등은 정성스러운 손님 접대용 음식으로도 여겨졌으며, 지역에 따라 혼례 음식에 소량을 넣어 색과 의미를 더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구기자를 담금주로 만들어 어른 생신이나 기력 회복 시 음용하는 풍속도 있었다. 이처럼 구기자는 단순히 ‘기능성 건강식품’이 아니라, 삶의 의례와 연결된 문화적 식재료로도 기능해왔다.
오늘날에도 진도에서는 ‘구기자차는 식후에, 구기자환은 계절 사이에’라는 말이 전해진다. 이는 구기자의 복용 시점이 그저 습관이 아닌 몸의 기운과 계절의 흐름을 조율하는 생활의학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구기자는 진도 사람들에게 단지 열매가 아니라, 시간과 경험이 만든 지혜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현대의 진도 구기자 산업, 전통을 계승한 건강 자산
오늘날 진도는 전국 최대 규모의 구기자 주산지로 성장했으며, 2006년에는 ‘진도 구기자’가 농림축산식품부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마쳤다.
진도군은 구기자를 지역 대표 농산물로 육성하며, 유기농 재배, GAP 인증 확대, 구기자 6차 산업화(가공·체험·관광 결합) 등 다양한 시도를 통해 약초 농업을 현대화하고 있다.
또한 매년 개최되는 ‘진도 구기자 축제’에서는 재배지 견학, 구기자 수확 체험, 구기자 음식 시식, 약초차 시음회 등이 함께 열리며, 단순한 건강식품이 아닌 지역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고 있다.
청년 농부들은 구기자를 활용한 스틱형 건강즙, 구기자 미스트, 화장품, 구기자 와인까지 개발하며, 전통 약초가 오늘날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에 맞게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하지만 진도 사람들은 여전히 “구기자는 땅과 바람이 만든 약”이라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천년 넘게 이어온 약초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낸 건강의 철학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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