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경북 청도 반시(연시), 씨 없는 감이 된 비밀 유전자의 기원

insight-2007 2025. 7. 2. 09:02

씨 없는 감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청도 반시에 담긴 유전의 비밀과 조선의 전통

경상북도 청도에서 자라는 감, 특히 씨 없는 연시로 잘 알려진 ‘청도 반시’는 단순한 과일을 넘어선 깊은 역사와 유전적 비밀을 품고 있다. 대부분의 감이 씨를 품고 있는 반면, 청도 반시는 부드럽고 말랑한 과육 속에 씨앗 없이 단맛만을 남긴다. 이 특별한 특성은 단순한 돌연변이의 산물이 아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재배 기술, 청도 특유의 토양과 기후, 그리고 세대를 거쳐 씨 없는 감만을 선별하고 계승해온 농민들의 지혜가 더해져 만들어진, 인류와 자연의 공동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 속에도 청도의 감나무 과원이 언급될 만큼 이 지역의 감 재배 역사는 유서 깊으며, 유교적 예식에서 씨 없는 감은 ‘공손함’과 ‘정갈함’을 상징하며 제례와 혼례, 명절 진설 음식으로 사용되어 왔다.

씨 없는 감 경북 청도 반시(연시)

 

또한, 자연 숙성과 볏짚 발효라는 전통적인 감 숙성 기법은 연시 고유의 깊은 단맛을 더욱 돋보이게 해, 청도 반시가 단순한 먹거리를 넘어 민속·제례·약선의 범주에까지 걸쳐온 식문화의 핵심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씨 없는 감이라는 독특한 유전 형질이 어떻게 지역의 농업 문화 속에서 계승되어 왔는지, 그리고 조선 후기부터 현대까지 청도 반시가 지닌 역사적 가치와 민속적 상징성은 무엇인지를 깊이 있게 풀어보고자 한다.

감나무와 청도의 땅이 만들어낸 씨 없는 유전자의 기원

청도 반시의 역사는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경상도 청도 일대에 감나무 과원이 형성되어 있으며, 다른 지역보다 과육이 크고 맛이 뛰어나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감은 청도에서 가장 품질이 좋으며, 가을 햇볕이 넉넉한 마을마다 따로 심겨 있노라”고 언급되어 있다.
즉, 청도 지역은 조선시대부터 이미 고품질 감 산지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당시에도 관청에 바치는 공물로 취급될 정도로 귀한 과일이었다.

청도 반시는 ‘부유계’ 반시 품종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품종은 감나무 유전적 특성 중 자연적으로 씨를 형성하지 않는 유전형질(유전적 돌연변이)을 지닌다. 이 형질은 일반적으로 희귀하며, 온난하고 건조한 지역에서 세대를 거쳐 자생하면서 고정되는 경우가 많다.

청도는 내륙 분지 지형으로, 연중 일조량이 높고 비가 적으며, 낮과 밤의 일교차가 크다. 이러한 기후는 감의 당분 축적을 도우면서도 씨 발달에 필요한 습도나 수분 스트레스를 제한하는 환경을 만들어준다. 즉, 청도 반시의 씨 없는 특성은 단순한 돌연변이가 아니라, 자연과 농부의 선택과 반복 속에서 만들어진 유전적 고정의 결과다.

뿐만 아니라, 청도에서는 씨가 없는 감을 따로 골라 종자를 번식하고, 묘목을 관리하는 전통적 재배법을 이어오며 이 품종을 세대에 걸쳐 지켜냈다. 그 결과, 지금의 청도 반시는 자연적 돌연변이를 지역 전체가 ‘문화적으로 재배하고 확장한 결과물’이 된 것이다.

민속과 의례 속의 감 문화, 청도 반시의 생활사

조선시대 청도 반시는 상류층이나 사대부 가문에서 제수용 감으로 활용되었다.
씨가 없는 감은 깨물었을 때 깨물리는 소리가 작아 ‘공경’과 ‘정갈함’을 중시하던 유교 제례에 더욱 어울린다는 인식이 있었으며, 『가례집람』이나 『예기』 속 해설에서 “감은 무겁고 정숙하며 단 것을 올릴진대 가장 안성맞춤이라”는 구절도 남아 있다.

청도에서는 감을 연시(熟柿)로 익혀 먹는 풍습이 발달했고, 볏짚을 활용한 자연 숙성 기술이 보편화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저장법이 아니라 발효와 숙성의 중간지점에서 감의 떫은맛을 없애고 당도를 최고로 끌어올리는 전통지식이었다.

또한 청도 반시는 혼례 상차림이나 정월대보름 진설 음식, 고사상 과일로 빠지지 않고 올랐으며, 겨울철에는 연시를 얼렸다가 반쯤 녹여 ‘얼린 감(빙시)’으로 먹는 풍습도 이어졌다. 이러한 음식 문화는 지역민들 사이에서 청도 반시를 단순한 과일이 아닌 ‘고향의 맛’과 ‘가족의 시간’을 상징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청도는 경북 유림문화의 중심 중 하나로, 감의 정결함과 청빈함, 절제된 단맛이 유교적 삶의 철학과도 맞닿아 있었다. 감 한 알을 두고도 예와 품격을 이야기했던 조선 사대부들의 삶이, 지금의 청도 반시 문화 속에 스며 있는 것이다.

현대에 이어지는 품종 보존과 산업화, 문화유산이 된 감

오늘날 청도는 전국 반시 생산량의 30% 이상을 차지하며, 대한민국 대표 감 주산지로 자리매김했다. 2005년에는 ‘청도 반시’가 지리적 표시제(GI) 등록을 완료하였고, 연시, 감말랭이, 감식초, 감잎차 등 다양한 가공품으로도 시장이 넓어지고 있다. 특히 감 와인(청도 감와인), 감잎 건강식품 등은 기능성 식품 트렌드에 맞춰 소비층을 넓히고 있으며, 청년 농부들이 창의적 제품을 개발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청도군은 매년 ‘청도 반시 축제’를 개최하며, 감 수확 체험, 전통 숙성법 재현, 감 요리 경연 등을 통해 지역의 정체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축제는 단순한 농산물 홍보를 넘어, 전통 감 재배 문화와 세대를 잇는 농업의 가치를 대중과 공유하는 문화 행사로 자리잡았다. 무엇보다 청도 사람들은 씨 없는 감은 씨 없는 수고 끝에 나온 결과라 말한다. 그 말에는 수백 년 동안 마을 공동체가 함께 이 품종을 가꿔왔다는 자부심과, 유전자가 아니라 문화가 지켜낸 농업 유산이라는 인식이 담겨 있다.

청도 반시는 이제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유전학적 희귀성과 전통 농업 지식, 민속과 역사까지 담은 살아 있는 지역 자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