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부산 기장 미역,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바다의 선물

insight-2007 2025. 7. 2. 16:49

미역은 왜 기장에서 귀한 음식이 되었을까? 바다와 궁중이 이어준 미역의 역사

부산 기장은 오래전부터 ‘미역의 고장’으로 불린다. 그 이름에는 단지 지역 특산물이라는 의미를 넘어, 조선시대 궁중 수라상에까지 올랐던 미역의 역사적 품격과 문화적 의미가 함께 담겨 있다.

임금님 수라상에 오르던 부산 기장 미역


‘미역국’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지만, 그 뿌리를 깊이 따라가 보면 궁중 의례와 해양 생태, 그리고 지역민의 손끝에서 비롯된 오랜 이야기를 품은 음식임을 알 수 있다. 그 중심에 바로 기장 미역이 있다. 기장의 해안선은 길고 완만하며, 조류가 빠르고 영양염류가 풍부한 청정 해역이다. 이 지역의 특수한 해양 환경은 미역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단순히 환경만이 기장 미역을 유명하게 만든 건 아니다. 조선 후기부터 기장의 미역은 왕실 진상품으로 기록되었고, 각종 의례와 산후조리 음식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이 글에서는 부산 기장 미역이 어떻게 수백 년 전부터 궁중으로 올라갔고, 지역에서 어떻게 보존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역사와 문헌, 생활문화의 흐름을 따라가며 살펴본다.

조선 왕실과 기장의 바다, 미역이 수라상이 되기까지

기장 미역이 처음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조선 중기 『경상도속찬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 “기장에서 미역과 해조가 많이 난다”는 언급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이 미역이 왕실로 들어간 최초의 공식 기록은 『승정원일기』와 『의궤』에서 확인된다.
조선 후기 궁중 문서에 따르면, 기장의 미역은 임금님 탄신일이나 효명세자 탄생일 등에 수라상 또는 산후조리용 진상품으로 올랐다는 기록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기장 미역이 단순히 맛이 좋아서가 아니라, 영양과 약성 면에서도 특별히 인정받았다는 증거다.
당시의 한의학 이론에 따르면 미역은 “속을 맑게 하고, 피를 맑히며, 태를 안정시킨다”고 여겨졌고, 『동의보감』에는 “산모가 먹으면 피가 돌고, 뱃속을 덥힌다”는 기술이 있다.

기장의 해역은 미역 자생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수온이 10~20℃를 오가는 해양 온도, 조수 간만의 차가 커서 하루 두 차례 햇빛과 물속을 오가는 조건, 풍부한 미네랄과 조류 순환이 활발한 기장 앞바다는 길고 얇고 부드럽지만 질긴 기장 미역의 품질을 자연스럽게 완성시켰다. 그 결과, 기장 미역은 전국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기장 관청을 통해 매년 일정량을 궁중에 올리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공물 체계는 지방 특산물 중에서도 품질이 뛰어난 것만이 궁중에 오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근거다.

산후조리와 제례 속 미역의 위상, 기장 미역의 민속적 가치

기장 미역은 궁중뿐 아니라 민가에서도 오랜 시간 산모의 건강식, 제례용 의례식, 정월 음식으로 특별한 의미를 가져왔다.
‘산후에는 미역국’이라는 말은 단순한 생활 습관이 아니라, 의학적·문화적 이유가 분명한 전통 지식의 축적이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산모가 해산 직후 먹는 국물로는 기장에서 나는 미역이 가장 부드럽고 피를 맑게 하여 좋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실제로 조선 후기 양반 가문에서는 기장 미역을 특별히 구해다 산모에게 끓여 먹이는 풍속이 보편화되었다.

또한 기장 미역은 조상 제사상에도 오르곤 했는데, 이는 청결하고 해로운 기운을 씻는다는 상징성과 함께, 바다의 순환성과 생명성을 담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경상도 지역에서는 기장 미역을 제례 첫 국으로 올리는 전통이 일부 가문에서 지금도 남아 있다. 더불어 미역은 삼짇날이나 음력 3월 초하루에 ‘청미역국’을 끓여 마시며 한 해의 나쁜 기운을 씻는 풍속과도 연결된다. 기장 지역 어촌 마을에서는 이때 ‘미역 씻기’라는 마을 행사가 열려, 아이들에게 미역국을 먹이며 복을 기원하고 건강을 다짐하는 문화가 전해졌다.

이처럼 기장 미역은 단지 밥상 위 반찬을 넘어, 삶의 전환기마다 중심에 자리했던 상징적 해산물이었다.

일제강점기와 산업화 이후 기장 미역의 보존과 변화

기장 미역은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품질을 인정받았다.
『조선해면조사보고서』(1935)에는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에서 채취한 미역은 일본 관서 지방에서 약재 겸 식재로 인기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당시에는 미역을 단순히 건조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삶고 숙성한 후 해풍에 말리는 ‘해풍 건조법’이 널리 사용되었고, 이는 오늘날 기장 미역의 전통 제조법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광복 이후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를 지나며, 기장 미역은 부산을 중심으로 한 도시 소비시장과 관광객 대상 특산물로 재편되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건강식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기장 미역은 유기농 미역, 저염 미역, 프리미엄 미역 세트 등으로 상품화되기 시작했고, ‘기장 미역’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지역 브랜드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지리적 표시제 등록과 함께, 전통 해조류 산업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기장군은 미역 양식장 해양환경 보호, 전통 가공방식 계승, 청년 어민 교육 등을 통해 기장 미역의 미래 자산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특히 ‘기장 미역 축제’에서는 채취 체험, 미역 요리 대회, 전통 미역국 시식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 함께 미역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콘텐츠 중심형 지역행사로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살아 있는 역사, 기장 미역이 전하는 음식 이상의 가치

기장 미역은 단지 고급 미역이라는 말로 설명되기에는 아까운 식재료다. 그것은 바다와 바람, 햇살과 조류가 만들어낸 자연의 결정체이며, 동시에 수백 년을 이어온 사람들의 손맛과 지혜가 담긴 결과물이다. 왕실의 수라상에 오르던 시절부터, 산모의 국밥상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지금은 전통 식문화와 현대 산업이 만나는 접점에까지, 기장 미역은 한결같은 바다의 선물이었다.

오늘날 기장 미역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건강을 위한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궁중의 지혜와 민간의 정성이 함께 배인 한국 해양문화의 깊은 줄기를 한입에 느끼는 일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장의 파도는 미역을 기르고 있고, 그 바람 속에는 임금님의 수라상을 차리던 그 시절의 기억이 함께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