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임금에게 올려지던 전복, 완도의 바다에서 길러진 귀한 생명의 흔적
오늘날 전복은 고급 해산물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건강식이나 보양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전복이 이렇게 귀하게 여겨진 역사는 단지 현대에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미 고려시대부터 전복은 ‘공물(貢物)’로 진상되던 바다의 보물이었다. 특히 전라남도 완도는 청정한 바다와 조류, 해풍, 그리고 해조류가 풍부한 바다 환경 덕분에 전복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완도는 고려시대부터 왕실에 전복을 진상하던 대표 지역 중 하나로 기록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약재, 혼례 음식, 제사상에까지 오르며 의례적·의약적 가치까지 지닌 귀한 해산물로 자리 잡았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복이 남해안 일대에서 채취되어 궁중에 올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의방유취』에서는 전복을 “신장과 간을 보하고, 눈을 밝히며, 기혈을 조화롭게 한다”는 약재로 명기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완도의 바다가 어떻게 전복을 길렀고, 전복이 어떻게 고려·조선 시대 왕실과 민간에서 귀한 식재료로 여겨졌는지를 역사적 관점과 민속 문화 중심으로 깊이 있게 탐색해 본다.
고려와 조선의 기록 속 전복, 바다에서 궁중으로 오르다
전복이 문헌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시기는 고려시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전복이 진상품(공물)의 하나로 왕실에 납품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주로 전라도 해역, 특히 남해안 일대에서 수급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언급된다. 이는 전복이 단순히 산물이 아니라, 국가 단위에서 품질과 산지를 관리한 귀한 자원이었다는 뜻이다. 특히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완도 근해에 전복이 많으며, 조류가 빠르고 해초가 많아 그 크기와 질이 남다르다”고 기록되어 있어, 완도 전복의 품질이 예로부터 탁월하게 인식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도 전복은 궁중 수라상의 주요 식재료 중 하나로 올라갔다. 『진찬의궤』에서는 “육지 보양에 전복이 빠질 수 없으며, 기운이 쇠한 자에게는 반드시 쓰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의방유취』나 『동의보감』 등 조선 한의서에서도 전복은 신장, 간, 시력, 혈액 순환에 좋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전복이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한방에서 인정한 보약이자 궁중 건강 유지 식재료였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고려와 조선을 통틀어 전복은 귀한 생물로 여겨졌고, 그 진상이나 유통에는 지역별 관리가 철저했다. 그 중심이 바로 오늘날의 전남 완도였고, 이 바다에서 자란 전복은 궁궐의 약방과 수라청으로 향했다.
완도 바다의 특별한 생태, 전복을 길러낸 자연 조건
전복이 특별한 이유는 그 자체가 까다로운 생물이라는 점에 있다. 전복은 맑고 산소가 풍부한 바닷물, 적정 수온(12~20℃), 풍부한 해조류(미역, 다시마 등)가 있어야 제대로 자란다. 이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지역이 바로 전라남도 완도다. 완도 앞바다는 조류가 빠르고, 플랑크톤과 해조류가 풍부해 전복의 먹이가 충분히 공급되며, 암초 지형이 발달해 전복이 붙어 살기에 적합한 생태계를 제공한다.
과거에는 해녀나 어부들이 맨손으로 바위 밑을 뒤져 전복을 채취하는 방식으로 어획했으며, 이는 매우 위험하고 숙련된 작업이 필요했다. 완도는 조선시대부터 해녀 문화가 일부 존재했으며, 특히 여성 어업인 중심의 해산물 채취 전통이 전복 어획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전복을 채취하면 즉시 건조하거나 염장 처리해 보관하였고, 말린 전복은 ‘전복포(鮑脯)’라 하여 궁중에서 약재로도 활용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전복을 값비싼 식재료로 인식하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까다로운 생태 조건과 높은 노동 강도 때문이다. 완도의 해양 환경은 천혜의 전복 서식지이자, 수백 년 동안 그 품질을 지켜온 살아 있는 전통의 바다인 셈이다.
전복과 민속문화, 제사상과 산후조리의 전통 속 전복
전복은 단지 왕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민간에서도 전복은 극히 귀한 날에만 등장하는 귀한 음식이자 보약으로 여겨졌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제사상과 산후조리 음식이다.
『가례집람』에는 제수음식 중 하나로 전복이 언급되며, 특히 남도 지역에서는 전복전, 전복초, 전복죽 등으로 조리하여 제사에 올리는 풍속이 널리 퍼져 있었다. 전복은 바다에서 태어나지만, 그 속살의 색이 흰빛을 띠어 순수와 정결함의 상징으로 간주되었고, 그로 인해 제사의 첫 반찬 또는 탕에 사용되었다.
또한 전복은 산모의 회복을 돕는 음식으로도 애용되었다.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산모에게는 전복죽을 끓여 먹이면 혈이 돌고, 기운이 빠르다”는 표현이 있으며, 전복은 생선과 달리 담백하고 위에 부담이 적어, 출산 후 회복기 음식으로 적절하다고 여겨졌다. 기장 미역과 함께 끓인 전복 미역국, 전복과 닭고기를 함께 넣은 전복삼계탕, 전복찜 등은 부유층이나 양반가에서 손님을 대접할 때 가장 격식 있는 상차림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전복은 식재료를 넘어 의례와 건강, 가족을 중심으로 한 문화적 가치가 깊이 새겨진 해산물이었다.
오늘날의 완도 전복 산업, 전통을 잇는 해양 문화유산
현재 완도는 대한민국 전체 전복 생산량의 약 8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생산지이며, ‘완도 전복’이라는 이름은 국내외에서 프리미엄 해산물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2006년에는 ‘완도 전복’이 지리적 표시제 등록(GI)을 마쳤고, 완도군은 이를 기반으로 전복 양식업의 현대화와 친환경 인증 확대, 수출 전략을 강화해오고 있다.
완도는 단순한 양식지가 아니라, 전복을 둘러싼 역사와 문화를 함께 전승하려는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완도 전복축제’에서는 전복잡기 체험, 전복요리 경연대회, 해녀 시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전복을 통해 지역의 해양 문화와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전복을 활용한 건강식, 전복엑기스, 전복 통조림, 전복 화장품 등 6차 산업 제품도 활발히 개발되며, 현대의 소비자들에게도 ‘귀한 전통’으로서의 이미지를 확장하고 있다.
완도의 바다에서 태어난 전복은, 이제 단지 건강식품이 아니라 고려부터 이어진 수라의 기억과 민속의 정서, 지역경제의 중심이 된 문화유산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자연과 인간, 바다와 삶을 연결하는 살아 있는 음식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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