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남 해남 고구마, 불교 절에서 시작된 구황 작물의 반전 역사

insight-2007 2025. 7. 4. 23:07

고구마는 어떻게 절에서 자라나 조선을 구했을까?

전라남도 해남은 '땅끝마을'로 알려진 아름다운 해양도시이자, 전국 고구마 생산량 상위권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고구마 산지다. 하지만 해남 고구마의 뿌리는 단순한 농산물에 그치지 않는다.

불교 절에서 시작된 전남 해남 고구마


그 역사적 기원은 조선 후기 불교 사찰의 자급자족 농사와 구황(救荒) 활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고구마 한 알 속에는 배고픔을 막기 위한 자비와 생존의 기억, 그리고 땅과 사람이 함께 만든 농업 유산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조선 후기,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고 불교는 공식적으로 억제되던 시기에도, 남도의 절집들은 산간과 해안의 오지를 기반으로 자급자족의 농경과 약초 재배, 식량 보급의 마지막 보루 역할을 했다. 이때 사찰 주변에서 실험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작물이 바로 고구마였으며, 해남의 여러 사찰, 특히 대흥사(大興寺)를 중심으로 고구마가 퍼져 나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글에서는 해남 고구마가 조선의 절에서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이 작물이 민중의 생존을 책임지던 구황작물로 확산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해남 지역의 대표 산업과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를 역사적 흐름을 중심으로 조명해본다.

 

조선 후기 불교 사찰과 고구마의 도입, 그리고 대흥사의 역할

고구마는 원래 남미 원산으로, 16세기 일본을 거쳐 조선에 전래되었다. 공식적으로는 1763년 조엄(趙曮)이 일본에서 고구마 종근을 가져온 것이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남부 해안에서는 이보다 앞선 시기부터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고구마가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는 민간 기록과 지역 전승이 존재한다.

전남 해남은 대흥사를 비롯한 남도 불교의 중심지였으며, 조선 후기에도 불교계는 농사와 약초 재배, 산림 식물의 활용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다. 대흥사는 특히 의약, 음식, 농사 기술을 함께 전승하던 승려 공동체였고, 이곳의 밭에서 처음 고구마가 심겨졌다는 전설이 지역에 남아 있다. 실제로 『해남군지』와 지역 사찰 기록에는, 대흥사 주변 승려들이 고구마를 약용·구황용으로 재배했다는 구절이 확인되며, 기근이 발생했을 때 절에서 주민들에게 고구마를 나눠주었다는 구전 기록도 전해진다. 이처럼 해남에서의 고구마 재배는 단지 식량 확보를 넘어, 종교 공동체의 생존 전략이자 사회적 실천의 일환이었다. 즉, 고구마는 조선 후기 정통 농업체계가 작동하지 않던 지역에서 먼저 실험되고, 민중 구제를 위해 퍼져나간 ‘비공식 구황작물’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해남과 불교 사찰이 있었다는 점은, 고구마의 도입과 확산에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을 뜻한다.

고구마가 ‘백성의 생명줄’이 되다 – 구황작물의 확산과 기록

조선 후기 전란과 자연재해, 기후 변화는 농민들의 삶을 위협했다. 쌀과 보리는 대체로 평지에서만 재배가 가능했고, 수확 시기도 늦고 재배법도 까다로웠다. 이에 비해 고구마는 비옥하지 않은 땅에서도 잘 자라고, 수확량도 높으며, 저장도 쉬운 작물이었다. 이러한 특징 덕분에 고구마는 곧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구황작물로 자리잡게 된다.

영조 39년(1763) 이후, 조엄의 보고에 따라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고구마 재배를 장려하는 조치가 마련되었고, 『증보산림경제』나 『농정촬요』 등 농서에도 고구마 재배법이 수록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전남 해남·완도·강진 등지의 사찰에서는 이미 고구마를 실용 작물로 다루고 있었다는 지역 기록과 전승이 앞선다.

『연려실기술』에는 고구마가 “하늘이 돕지 않아도 땅속에서 근근이 자라니, 백성이 살 길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해남 출신 유생 이장경(李章敬)의 문집에도 ‘고구마를 나눠 백성을 살렸노라’는 기술이 존재한다. 이처럼 고구마는 조선 후기 기근의 상징이자 생명의 식물로 받아들여졌고, 해남은 그 중심지였다. 특히 산간과 해안에 접한 해남 지역은 고구마 확산의 출발지이자, 전국 확산의 전략적 거점 역할을 했다. 이곳에서 자란 고구마는 주변 진도, 강진, 장흥을 거쳐 경남·경북으로 확산되었고, 20세기 초에는 개성·평양 일대까지 확장되었다.

민간 식생활과 제례에서 고구마가 자리 잡기까지

고구마가 대중적인 식재료로 자리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해남을 중심으로 절집 음식과 민간 요리가 결합되며 식문화 속으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불교 사찰에서는 고구마를 증편, 정과, 구이, 죽, 된장국 등 다양한 조리법으로 응용했고, 이는 기근기뿐 아니라 평상시에도 건강식·보양식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고구마는 점차 민간 제례 문화에서도 중요한 음식으로 등장했다. 제사 음식에 고구마 찜과 말랭이를 올리는 풍속은 전남·전북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특히 영암, 해남, 나주 등지에서는 고구마밥을 제례상에 올리는 풍습이 지금도 일부 남아 있다. 또한 고구마는 20세기 들어 군량미 대체 식량, 학교 급식, 군 병영식단, 보릿고개 주식으로도 자리잡았고, 해남 지역은 그 공급 중심지로 역할을 해왔다.

한편, 고구마 줄기와 잎은 가축 사료로도 활용되었으며, 뿌리 외에도 버릴 것이 없는 작물로 지역 주민들의 생계에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민속적 실용성은 고구마가 단순히 먹는 작물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고 이끈 생존의 상징이었음을 뜻한다.

현대 해남 고구마 산업, 전통과 생명을 잇는 유산

현재 해남은 전국 고구마 생산량의 약 15% 이상을 차지하는 대표 산지로, ‘해남 황토고구마’, ‘해남 꿀고구마’, ‘해남 밤고구마’ 등의 이름으로 브랜드화돼 있다. 이 지역의 황토 토양은 고구마의 당도를 높이고, 저장성을 유지시켜 품질을 유지하는 핵심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해남군은 고구마를 지역 대표 작물로 지정해 친환경 농법, 스마트팜 연계, 6차 산업 기반 확대를 통해 전국적 유통망을 확보했고, ‘해남 고구마 축제’, ‘고구마 마을 체험’, ‘고구마빵·청·말랭이’ 등 다양한 콘텐츠 상품으로도 확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남 고구마는 단순한 특산품이 아니라, 절에서 시작된 자비와 생존의 상징, 조선 민중의 구황 역사, 그리고 현대 농업의 자부심이 담긴 지역 유산이다.

오늘날 우리가 쉽게 먹는 고구마 한 조각에도, 절에서 흙을 일구며 사람을 살리려 했던 그들의 손길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