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의 기억, 제천의 땅에 남은 자립의 흔적
충청북도 제천은 예로부터 산과 들, 그리고 물길이 어우러진 중부 내륙의 대표적 곡창지대였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풍경도 일제강점기라는 거대한 역사적 격변 속에서 깊은 상처를 겪었다. 수탈과 탄압, 흉년과 기근은 지역 농민들의 삶을 위협했고, 먹을 것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에 ‘옥수수’는 사람들을 지탱한 생명의 작물이었다. 특히 제천 옥수수는 단지 식량의 대체품이 아니라, 농민들이 일본 제국의 수탈 구조에 맞서 자립을 꾀할 수 있었던 작물로 기록된다.
제천은 지리적으로 험준한 산간 지형이 많고, 벼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고지대도 많은 편이다. 이러한 조건은 오히려 옥수수 재배에 적합했고, 지역 주민들은 옥수수를 이용해 기근을 극복하고, 일제의 쌀 수탈 정책에 대항하여 작은 식량 자급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이 글은 바로 그 이야기를 추적한다. ‘제천 옥수수’는 오늘날에는 건강 간식이나 지역 특산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시작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배고픔과 자립의 의지가 있었다. 본 글에서는 제천 옥수수의 전래와 확산, 일제강점기의 농업 구조와 자립 운동, 지역 음식 문화로서의 발전, 그리고 현대 제천 옥수수가 지닌 상징성과 가치를 차례대로 조명해본다. 작물 하나가 사람의 삶과 어떤 식으로 엮이는지, 그리고 역사를 통과하며 어떻게 지역 정체성이 되는지를 함께 살펴보자.
제천 옥수수의 시작, 산간 고을에 뿌리내린 이방 작물의 정착
옥수수는 원래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작물로, 16세기 후반경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중국과 조선을 거쳐 동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되었다. 조선에는 임진왜란 이후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초창기에는 ‘강냉이’, ‘옥촉서(玉蜀黍)’ 등으로 불리며 일부 지역에서만 소규모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확산은 19세기 말~20세기 초, 곧 일제강점기와 맞물리는 시기부터 시작된다.
제천 지역에서 옥수수가 본격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 시기와 겹친다. 제천은 평야가 좁고, 고지대와 경사지가 많은 지형적 특성상 벼보다 잡곡류 재배에 유리한 환경을 지녔다. 옥수수는 비교적 재배 기간이 짧고, 가뭄과 냉해에도 강하며, 어떤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급 농업을 지향하던 제천 농민들에게 매우 유리한 작물이었다.
실제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은 한반도의 식량 구조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재편하기 위해 ‘쌀 생산 중심의 농업 정책’을 강제했다. 이에 따라 벼를 재배하기 어려운 고지대 농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에 직면했고, 제천과 같은 내륙 산간 지역에서는 옥수수가 기근을 막는 구황작물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 제천에서는 가가호호 옥수수밭을 일구었고, 수확한 옥수수는 삶아 먹고, 말려두었다가 겨울 동안 죽이나 떡으로 조리해 활용하였다.
문헌기록은 많지 않지만, 구전과 민속기록, 일부 마을 문중의 제사 기록 등을 통해 당시 옥수수가 지역 사회의 주식으로까지 기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제천 옥수수는 껍질이 단단하고 알맹이가 굵으며, 저장성이 우수해 장기간 보관에도 유리했다. 이 때문에 겨울을 준비하는 농가들에게는 필수적인 작물이 되었다.
제천 옥수수와 일제강점기의 자립 운동, 농민의 저항이 된 곡물
일제강점기의 식량정책은 명백한 식민지 수탈 구조였다. 일본은 조선을 ‘쌀 공급 기지’로 삼기 위해 수많은 지역에 수리조합과 저수지를 설치했지만, 이는 특정 평야지역에만 효과가 있었고, 산간 지역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 제천은 이러한 구조 속에서 소외되었고, 벼농사 중심 농정의 바깥에서 스스로 자급할 수 있는 작물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 중심에 바로 옥수수가 있었다. 당시 제천의 농민들은 쌀을 생산하지 못한 대신,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으며 자립적인 생존 방식을 개발했다. 옥수수는 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두렁과 자투리땅, 심지어 산비탈에서도 재배할 수 있었고, 노동 강도에 비해 생산량이 높아 식량난을 겪는 가정에 큰 힘이 되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제천 지역에서 옥수수를 활용한 공동체 기반의 협동 생산, 품앗이 방식의 수확, 장터 직거래 등이 활발히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농업 유통 구조를 우회한 일종의 경제적 저항이었으며, ‘자급자족 기반 민중경제의 탄생’이라는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제천 장날에는 옥수수를 이용한 각종 먹거리 – 찐 옥수수, 옥수수 떡, 옥수수 묵 – 등이 거래되었고, 특히 가을 수확철에는 각 마을의 여인들이 직접 장터에 나와 옥수수를 삶아 팔거나 교환했다. 이 문화는 단순한 식량교환을 넘어 지역 여성들의 경제활동과 공동체 내 역할 재정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옥수수는 그렇게 ‘가난한 작물’이라는 이미지를 벗고, 자립과 공동체의 상징 작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제천 옥수수가 지닌 이러한 역사적 의미는 다른 지역의 옥수수와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성 중 하나다.
제천 옥수수가 지역 문화로 녹아들기까지의 여정
전쟁과 분단, 그리고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를 거치면서, 전국의 전통 작물 중 상당수가 사라지거나 외래 품종에 밀려 존재감을 잃었다. 하지만 제천 옥수수는 지역 주민들의 기억과 생활 속에서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고, 제천의 음식 문화, 제례 문화, 농촌 마을 풍습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제천에서는 여름과 초가을이면 마을마다 ‘옥수수 삶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을 쉽게 볼 수 있다. 제천 옥수수는 단단한 껍질과 쫄깃한 식감을 지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밥, 떡, 묵, 죽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특히 ‘옥수수묵’은 제천을 대표하는 향토 음식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 음식은 과거 식량난을 버티던 시절의 지혜가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는 상징적 예라 할 수 있다.
제천에서는 또한 ‘옥수수 삶기’가 가족 간의 유대행위로 인식되기도 한다. 수확한 옥수수를 삶아 마당에 말리는 과정은 어르신, 어머니, 아이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동 노동이었고, 이 속에서 세대 간 지식 전승과 정서적 유대가 형성되었다. 작물 하나가 지역민의 정체성과 문화를 형성하는 과정을 우리는 제천 옥수수를 통해 분명히 목격할 수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제천시와 지역 주민들은 ‘제천 옥수수’를 단순한 특산물이 아닌, 역사와 문화를 지닌 지역 브랜드로 재조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제천 옥수수축제’가 매년 여름 개최되며, 수많은 관광객이 제천의 전통과 자연을 경험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여기서 옥수수는 더 이상 배고픈 시절의 대체식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정체성과 환영의 상징으로 변화했다.
오늘의 제천 옥수수, 전통을 넘어 미래로 향하는 구황의 지혜
오늘날 제천 옥수수는 단지 향토 식자재로서의 가치를 넘어, 지속 가능한 지역 농업의 미래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친환경 농법, 스마트팜 시스템, 지역 청년 창농 등과 연계하여 ‘제천 옥수수’의 생산과 유통을 현대화하는 노력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제천시는 ‘옥수수 품질 인증제도’를 통해 옥수수의 모양, 당도, 알맹이 밀도를 기준으로 고품질 제품을 선별하고 있으며, 이를 지역 로컬푸드 매장과 온라인 직거래 플랫폼을 통해 전국으로 공급하고 있다. 이러한 체계는 과거 자급 농업의 연장선에서 지속 가능한 시장형 농업으로 진화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또한 제천에서는 옥수수를 활용한 다양한 가공식품 개발도 이루어지고 있다. 옥수수 아이스크림, 옥수수 조청, 옥수수차, 옥수수 바 등은 젊은 소비층에게 어필하며 옥수수의 활용 가치를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역 농민과 소규모 가공업체, 청년 창업가들이 협업하며 지역 경제와 고용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제천 옥수수가 단순한 ‘상품’이 아닌, 하나의 ‘기억’으로 지역민의 삶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일제강점기의 배고픔 속에서 사람들을 살린 그 곡물이, 오늘날에는 지역을 살리고, 문화를 만들고, 미래를 설계하는 자산으로 다시 피어나고 있다. ‘구황작물’이라는 과거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 속에 담긴 자립의 철학과 사람들의 땀은 여전히 제천 옥수수의 맛 속에 살아 있다.
제천 옥수수, 자립의 곡물에서 지역의 상징으로
제천 옥수수는 단지 건강한 간식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라는 고통의 시대를 통과한 농민들의 자립의지, 산간 고을이 선택한 생존 전략, 그리고 그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생활 문화의 중심이었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사람들은 이 작은 곡물로 허기를 채웠고, 가족을 지켰으며,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지금, 제천 옥수수는 그 기억을 잊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과거와 현재, 고통과 희망, 구황과 축제. 이 모든 것을 동시에 품고 있는 제천 옥수수는 ‘특산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충북 제천이라는 지역의 정신이요, 땅과 사람의 연결고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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