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경북 상주 누에고치(양잠), 조선 통신사와 함께 떠난 명주 실의 전설

insight-2007 2025. 8. 1. 11:17

명주의 고장 상주, 실의 문화로 외교를 수놓다

경상북도 상주는 단순히 곡창지대가 아닌, 대한민국 섬유문화의 시원(始原)이자 양잠 산업의 본향으로 기록되는 고장이다. ‘누에를 치고, 고치를 감아 실을 뽑는’ 이 오래된 기술은 단순한 생업이 아닌 문화이자 외교 자산, 그리고 여성의 생애주기와 연결된 공동체의 지혜였다. 특히 상주에서는 조선 초기부터 왕실과 관리, 사대부 가문에 명주를 공급하는 지역으로 지정되었으며, 정성껏 길러낸 누에고치로 뽑은 실이 조선 통신사의 길을 따라 일본까지 전해졌다는 역사적 기록도 전해진다.

조선 통신사와 함께 떠난 경북 상주 누에고치(양잠)

 

양잠은 단순한 직물 산업이 아니라, 한반도의 지형·기후·생활 방식·여성 노동력·국가 외교 전략까지 아우르는 복합 산업이었다. 그 중심에 바로 상주 누에고치가 있었다. 상주의 지형은 양잠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조선 왕조는 상주 지역을 명주 직조의 중심지로 육성했다.

이 글은 상주 누에고치가 왜 특별한가를 단순한 생산량이 아닌, 조선의 문화와 외교, 여성의 노동과 공동체, 산업화 이전의 경제, 현대 문화유산으로의 계승 등 다양한 관점에서 조명하며, 지역 특산물 그 이상의 가치를 담아내고자 한다.

누에로 실을 뽑던 나라, 상주 양잠의 시작

상주의 양잠 역사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신라 중기에는 내륙 산간지대인 상주 일대가 따뜻한 기후와 배수가 잘 되는 구릉지로 누에 사육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곳으로 평가받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궁중에서 명주(明紬)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 명주가 상주, 문경, 예천 등 내륙지방의 양잠지에서 길러낸 누에고치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조선 초기에는 상주가 전국 3대 양잠지로 지정되었다. 경상도 감사 보고서와 『경상도속찬지리지』 등에 따르면, 상주는 "매년 일정량 이상의 명주를 공납하고, 누에고치의 상태에 따라 관청의 품질 평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기 상주의 누에 실은 ‘세공 명주(細工明紬)’로 불리며 왕실 및 조정 관리의 예복, 상복, 여름 의복의 원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부터 누에치기와 직조는 여성의 주요 생업이자 혼례 전 필수 교육 항목으로 간주되었고, 상주에서는 거의 모든 가정에서 봄이 되면 누에를 사육하며 ‘누에 들이기–누에 먹이기–고치 감기–실 뽑기’까지 한 사이클을 삶의 일상으로 수행했다. 누에 사육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기술이자 전통으로, 아낙네들의 손끝에서 고운 명주가 태어나던 시기였다.

이러한 오랜 양잠 전통은 단지 지역 생산물의 차원을 넘어, 조선 외교의 핵심 물자로 활용되었다. 바로 조선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날 때 상주산 명주가 공식 선물 품목으로 자주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상주 누에고치, 조선 통신사와 함께 건넌 외교의 실타래

조선 시대 통신사는 단순한 외교사절단이 아니었다. 통신사는 조선의 문물과 문화를 알리는 대표적 외교사절이었으며, 이들이 일본에 전달한 물품은 조선의 위상과 품격을 상징하는 수단이었다. 그중에서도 상주 누에고치로 짠 명주는 매우 귀한 선물로 다뤄졌으며, 일본 측에서도 "조선의 정밀한 직조 기술은 국가의 자존심을 보여주는 실의 예술"이라 평가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행록』과 일본 측 『대일본외교문서』에는 통신사가 가져간 물목 목록 중 ‘상주 명주’가 여러 차례 언급되어 있으며, 이는 조선 정부가 상주산 누에고치에서 추출한 실을 가장 질 좋은 것으로 간주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일본 에도 막부는 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상주 명주를 특별히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는 상주 누에고치가 단순한 직물 원료가 아니라 ‘외교적 품위’의 상징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상주 누에고치는 ‘명주 실의 전설’이라 불릴 만큼 고운 섬유결과 은은한 광택, 땀 흡수가 뛰어난 기능성으로 조선 명주 직조 기술의 정수였다. 상주 명주는 한올 한올 실의 길이가 길고 부드러우며, 염색을 해도 색이 곱게 스며들어 왕실의 연복(燕服), 무관의 제복, 여성용 치마저고리 등에 두루 활용되었다.

이러한 명주의 품질이 가능했던 이유는 상주 누에고치의 사육 환경과 기술력 덕분이었다. 상주의 뽕나무는 토질과 일조량에 따라 당도와 미네랄 함량이 높아 누에의 성장 발육에 최적이었고, 지역 여성들은 세대 간 전승되는 고치 감는 기술로 실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비단이 아니라 명주를 고집했던 이유는 조선 문화에서 명주는 검소하면서도 품위 있는 직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주 누에고치는 외교 사절의 손에 들려 국경을 넘었고, 한국 전통 직물과 여성 노동의 결합체로서 조선의 문화적 품격을 대표하는 산물이 되었다. 명주의 실은 상주의 산간에서 시작되어, 한양을 거쳐 에도의 궁정까지 실려 간 가장 조용하고도 강력한 문화 교류의 매개체였던 셈이다.

현대에 되살아난 상주 누에고치 산업과 문화자산화

한때 전국적으로 사양화의 길을 걷던 양잠업이 상주에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단순한 산업적 회생이 아닌 문화자산화의 흐름에서 비롯되었다. 1970~80년대까지만 해도 전국 곳곳에서 누에를 키우던 풍경이 흔했지만, 화학섬유와 값싼 외국산 직물이 국내 시장을 장악하면서, 많은 지역이 누에 사육과 명주 직조를 포기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주는 예외였다. 양잠을 단순히 경제작물로 보지 않고, ‘조상 대대로 전해온 생활문화’로 인식했던 상주 농가들의 정체성 덕분이다.

상주시 외남면, 공검면, 사벌면 일대에는 지금도 누에 사육을 이어가는 농가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단순히 고치를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누에 실뽑기 체험, 명주짜기 시연, 누에고치 염색공예, 잠사문화 해설 교육 등을 결합한 농촌 융복합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키고 있다. 상주시는 2005년부터 ‘상주 잠사전시관’을 운영하면서, 양잠의 역사, 누에 생태, 실 뽑는 도구, 조선 시대 예복 등을 전시하고, 지역 초등학생과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체험형 프로그램도 상시 운영 중이다.

또한 상주는 명주의 전통 직조 기술을 복원하기 위한 공방 시스템도 마련했다. 상주 지역 여성 장인들이 중심이 되어 전통 배틀(베틀)을 활용한 수직기 직조 기술과 고운 실 엮기 기법을 복원하였으며, 이 기술은 현재 경북도 무형문화재로 지정 신청 중이다. 이를 통해 상주는 ‘전통 실 문화 도시’라는 새로운 이미지까지 함께 구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누에고치를 단순 섬유 원료에서 나아가 웰빙 건강소재로 재발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에고치 단백질(세리신) 추출물을 활용한 피부 미백 크림, 천연 필름 마스크, 모발 영양 에센스 등이 출시되고 있고, 누에 분말을 활용한 고혈압·당뇨 관리 건강식품, 고치차, 누에환 등 민간보조식품이 건강기능식품 시장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러한 제품들은 ‘상주산 누에 100%’라는 원산지 스토리와 전통성을 함께 담고 있어, 단순한 제품이 아니라 ‘문화 있는 건강소재’로서의 프리미엄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또한 상주는 ‘상주 명주를 다시 입히자’는 목표 아래 한복 디자이너들과 협력하여 전통 명주 소재로 만든 생활한복, 예복, 퓨전 개량한복, 해외 전시용 작품 등을 제작하고 있다. 이는 누에고치의 실이 단순히 전통에 갇힌 소재가 아니라, 현대 문화예술로 확장 가능한 재료임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례이다.

결국 상주 누에고치는 다시 ‘살아 있는 전통’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생산량이나 수출량으로만 평가되는 작물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손끝에서 이어온 문화기술, 민속 지혜, 여성의 노동 유산, 그리고 현대 산업의 새로운 가능성이 모두 결합된 다차원 콘텐츠로 재탄생한 것이다.

실의 기억을 미래로, 세계로: 상주 명주의 유산과 글로벌 잠재력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농업은 단순한 식량 생산을 넘어, 역사와 문화, 자연과 기술이 결합된 정체성 기반 산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상주 누에고치와 명주는 지역 전통 산업의 글로벌화에 있어 최적의 콘텐츠로 평가받고 있다.

첫째, 상주 명주는 ‘슬로우 패션(Slow Fashion)’ 트렌드에 가장 적합한 전통 섬유다. 천연섬유, 윤리적 생산, 지속가능성 등을 강조하는 유럽과 북미 패션시장에서 화학처리 없는 명주 실, 전통 방식의 직조, 지역 장인의 손길은 차별화된 고급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이미 상주의 한 명주 공방은 프랑스 파리의 공예 전시회에서 ‘동양의 숨결을 짜낸 실’이라는 극찬과 함께 수주를 받은 바 있으며, 이는 상주 누에고치가 세계적 소재로 충분한 경쟁력을 지닌다는 방증이다.

둘째, 상주 누에고치 산업은 ‘웰니스 산업’과의 융합 확장성이 크다. 누에고치 단백질은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거의 없고, 콜라겐·세리신 등 피부 친화적 성분이 풍부해, 전 세계 뷰티 시장에서 천연 기능성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상주산 누에를 이용한 기능성 화장품, 친환경 패키징 소재, 의료용 재료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으며, 상주시도 경북 바이오 산업단지와 협력해 ‘누에 기반 바이오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셋째, 상주 명주는 국가 문화외교 자산으로 재활용 가능성이 높다. 앞서 언급한 조선 통신사 시절의 역사성을 현대 외교 행사에 접목해, 국제 박람회, 한일 문화교류 전시, K-문화 패션쇼와 같은 무대에서 상주 명주 직물이나 복식이 활용된다면, 이는 단순한 제품 홍보를 넘어 한국 문화의 품격과 스토리, 지속가능성을 함께 전하는 콘텐츠가 된다.

실제로 2023년 경북도청은 ‘경북형 전통소재 글로벌화 전략’의 일환으로 ‘상주 명주 유산의 디지털 아카이빙 및 국제 전시 콘텐츠화’를 기획하였고, 이 프로젝트는 2025년 오사카 엑스포 참가를 목표로 콘텐츠 개발 중이다. 여기에 상주 누에고치의 전통 이미지, 전통 배틀 직조 영상, 고치 실감기 체험 VR 등이 포함될 예정이다.

넷째, 상주 누에고치는 지역민의 삶과 정체성을 지켜온 유산이자, 다음 세대에게도 전해져야 할 문화 자산이다. 단지 옛날 이야기로만 남지 않기 위해, 상주시는 청소년 대상 ‘양잠 교과 연계 교육’, ‘명주 실로 짓는 시 공모전’, ‘누에고치 체험형 인문학 캠프’ 등을 운영하며, 지역의 미래 세대에게 이 유산을 일상으로 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상주 누에고치는 삼국시대 뿌리 내린 섬유문화의 씨앗이자, 조선의 외교를 실로 엮은 상징이며, 21세기 세계에 전할 수 있는 ‘문화 있는 소재’, ‘기억이 살아 있는 섬유’다. 이제 이 실은 과거의 시간을 넘어서 미래를 엮는 실, 세계와 연결되는 실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