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그늘 아래, 조선 선비가 품었던 과일 한 송이의 계절
여름이면 유난히 정갈한 단맛을 품고 고요히 익어가는 과일이 있다. 바로 참외다. 참외는 단순히 갈증을 달래는 여름 과일이 아니라, 조선의 양반가 정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식물이었다. 특히 경북 예천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참외를 여름철 상서로운 과일로 여겨, 사랑채 옆의 작은 마당에 심고 관상과 소비를 함께하는 전통이 이어져왔다.
예천은 지형적으로 평야와 구릉이 고루 어우러지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 유역을 따라 수분 공급과 일조량, 토양 배수가 뛰어난 환경을 갖췄다. 이 조건은 참외 재배에 이상적이며, 실제로 조선 후기의 문헌과 양반가 일기장 곳곳에서 예천 지역에서 재배된 참외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참외 한 덩이로도 품격을 드러낸다’는 말처럼, 과일 한 송이에 담긴 문화와 계급의 풍경이 예천 참외에 고스란히 스며 있다.
이 글에서는 예천 참외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닌, 조선의 문화와 계급 구조, 양반가의 정원 문화, 지역 기반의 고급 작물 재배, 현대 명품 과일 산업과 세계화로 이어진 역사적 흐름 속 가치를 지닌 과일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양반가 정원에서 자란 과일, 참외의 조선 문화사
조선 후기의 양반가에서 정원은 단순한 조경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성찰의 공간이자, 자연을 가꾸고 품위 있는 삶을 실천하는 무대였다. 이 정원에는 연못과 정자, 수목뿐 아니라 계절별로 의미 있는 식물과 작물이 심어졌으며, 그중 여름철을 대표하는 식물이 바로 참외(菴瓜)였다.
『열하일기』, 『성호사설』 등 조선 후기 문헌에 따르면, 참외는 상류 계층의 여름 과일로 인식되었으며, 단맛과 모양, 색깔 모두가 품격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참외는 특히 관상용과 식용이 동시에 가능해 사랑채 마당이나 담장 옆 텃밭에 한 줄씩 심는 경우가 많았고, 잎이 우거지며 그늘을 만들어주는 특성 때문에 정자 주변에 자주 배치되었다.
이러한 정원문화는 특히 경북 예천 지역의 양반가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예천은 조선 후기까지 경북 내 대표적 유림 거점 중 하나로, 이일, 권문해, 권상하 등 실학과 성리학 양쪽에서 큰 인물들을 배출한 지역이다. 이들 가문에서는 ‘자연과 함께하는 생활’을 중시하며, 정원의 구성 요소로서 참외를 중요한 과일로 인식하였다.
참외는 여름철 손님 접대 음식으로도 쓰였는데, 예천 일기문 중에는 "손님 오시거든 금주 대신 참외 한 덩이 내어 대접하라"는 표현이 남아 있다. 이는 참외가 단순한 갈증 해소용 과일이 아니라, 품위 있는 접대 과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또한 참외는 문인화, 병풍, 자수 등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하며, 수확한 참외를 식탁에 올리는 장면은 조선 후기 회화에서도 하나의 의례처럼 그려졌다. 참외가 단순히 재배된 것이 아니라, 양반의 미적 감각과 계절 인식, 삶의 결을 담은 문화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예천 참외, 지역과 기후가 만든 고급 과일의 원형
예천 참외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조선시대 정원에 심어졌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지역만의 독특한 기후와 토양, 재배 전통이 결합되어 참외가 고유의 품질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천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흐르는 분지형 지형을 갖고 있으며, 여름철 일조량이 길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며 사질양토 위주의 배수가 좋은 토양을 보유하고 있다. 이 조건은 참외의 당도를 높이고, 껍질을 얇게 만들며, 과육을 부드럽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실제로 『경상도지』와 『조선지지자료』에는 예천 지역에서 재배되는 참외가 ‘당도가 높고 결이 고우며, 씨가 작아 귀한 과일로 여겨진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상류층이 즐겨 먹는 ‘상산금과(尙山金瓜)’로 불릴 만큼 명성을 얻었다. 상산은 예천의 옛 지명이다.
예천 참외의 또 다른 특징은 오랜 자가재배와 토착화된 품종 유지다. 대부분의 참외 주산지에서는 현대 품종이 대량 보급되며 유전자 균일화가 이루어진 반면, 예천에서는 일부 농가에서 자체 교잡한 참외 씨앗을 수십 년간 유지하며, 껍질 색과 당도, 저장성 등에서 독자적인 특성을 갖는 품종을 길러왔다. 이러한 품종은 얇은 황색 껍질, 복숭아 향이 살짝 나는 고유의 향, 그리고 수분감 높은 과육과 산미 없는 단맛이 특징이며, 실제로 예천의 농산물 축제에서는 이 참외를 맛본 방문객들이 "참외인데 멜론 같은 향이 난다", "껍질이 얇고 뒷맛이 없다"는 평가를 남기곤 한다.
무엇보다 예천 참외는 양반가 재배에서 지역 특산물로, 그리고 현대의 고급 과일로 이어지는 ‘문화적 계승’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가진다. 단지 잘 자라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품격과 식문화의 정체성을 담은 과일로서 가치가 형성된 것이다.
예천 참외의 현대 산업화와 프리미엄 과일 브랜드화
예천 참외는 이제 단순한 여름철 과일이 아니라, 고급 농산물 브랜드의 대표 품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단순히 품질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예천 지역이 역사적 유산과 지역 농업 인프라, 브랜드 전략을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산업화에 성공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참외는 성주, 함안 등지에서 주로 재배되었고, 예천은 규모면에서 소외된 편이었다. 그러나 예천군은 이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참외 특화 작목반 육성, 친환경 재배 방식 도입, 예천 농산물 유통센터 현대화, 품종 연구소 및 농가 컨설팅 도입 등을 통해 참외 산업 기반을 체계적으로 구축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대량 생산 참외와 차별화된 ‘프리미엄 소량 정밀 생산’ 전략이 핵심이었다.
예천 참외의 브랜드화 전략은 ‘작지만 강한 과일’을 키우는 데 집중했다. 대부분의 참외 주산지가 크기와 무게 중심의 상품성을 강조할 때, 예천은 당도 기준 14브릭스 이상, 껍질 두께 2mm 이하, 저장성 5일 이상 유지, 재배 농가에서 직접 출하 전 선별 및 정형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설정하고, 이 기준을 만족하는 상품만을 ‘예천 참외’ 브랜드 로고와 함께 출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예천 참외는 단기간에 프리미엄 마켓, 백화점 농산물관, 온라인 고급 식재료몰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특히 고당도, 깔끔한 맛, 균일한 크기와 색상이 입소문을 타면서 명절 선물세트, 기업 VIP 전용 식품, 특급 호텔 납품용 과일로 수요가 증가했고, 이는 예천 농가의 소득 안정과 고정 고객층 형성으로 이어졌다.
또한 예천군은 ‘예천 참외’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지리적 표시제 등록 추진, 포장 디자인 개선 (한복 문양, 선비 이미지 등), 로컬푸드 직거래 플랫폼 운영, 농가 스토리텔링 기반 브랜딩을 병행하며, 단순한 과일이 아닌 ‘문화가 있는 농산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예천 참외가 단순히 맛있는 과일로서가 아니라, “조선 양반가 정원에서 자란 귀한 과일”, “선비 정신이 깃든 여름의 결실”이라는 문화적 스토리텔링을 기반으로 소비자에게 감성적 접근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 같은 전략은 고정 단골층 확보, 관광 상품 연계, 유튜브, SNS 바이럴 콘텐츠 확대로 이어지며, 브랜드 신뢰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예천 참외는 이제 산업적 가치뿐 아니라, 역사와 문화, 지역성까지 품은 과일로 인정받고 있다. 단순히 수확해 파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브랜드 자산으로 키워낸 사례이며, 앞으로 더 다양한 형태의 융합 산업으로 확대될 가능성을 지닌 프리미엄 농업 모델이다.
전통의 뿌리를 딛고 세계로, 예천 참외의 문화 콘텐츠 가능성
21세기 농업은 더 이상 생산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스토리와 정체성, 경험과 문화가 결합된 농업 콘텐츠만이 미래의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예천 참외는 국내를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경쟁력 있는 특산물 콘텐츠다.
첫째, 예천 참외는 ‘정원 문화와 과일 문화가 결합된 유일한 한국형 과일 브랜드’라는 점에서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가 가능하다. 일본, 유럽, 동남아 등에서는 이미 ‘컨셉 있는 과일’이 고가에 판매되고 있다. 예천 참외는 “조선 양반의 정원에서 유래된 프리미엄 여름 과일”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고급 선물세트, 한식 연계 과일, 한복 + 과일 브랜드 영상 콘텐츠등 다양한 문화적 접점에서 스토리 전달이 가능하다.
둘째, 참외는 외래 작물로 알려져 있지만, 예천에서 수백 년간 한국식 기후에 맞게 토착화되며 재배 기술이 정교화되었다는 점에서 ‘한국형 품종의 고유성’을 가진다. 이는 유럽이나 미국 시장의 ‘희귀성’ 소비 트렌드와 맞물려, 프리미엄 푸드 콘텐츠로 발전 가능성이 높다.
셋째, 예천군은 농업과 관광을 연계한 ‘오감 체험형 콘텐츠’ 개발에도 적극적이다. 현재 운영 중인 참외 수확 체험장, 참외 디저트 카페, 참외정원 산책길, 참외청·참외 와인 만들기 클래스 등은 도시 관광객, 외국인 체류자, 학생 교육 프로그램에 결합될 수 있는 ‘농업기반 감성 콘텐츠’로 전환 중이며, 이는 예천 참외가 관광 산업과 연계된 지속가능한 먹거리 브랜드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넷째, 예천군은 참외를 중심으로 ‘한국 과일 스토리 브랜드화’, ‘K-FRUIT 문화 콘텐츠’, ‘과일 다큐멘터리 + 선비 정신 융합 영상화’를 추진할 수 있는 다차원 콘텐츠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예천은 이미 한천, 삼강주막, 의병 역사 등 풍부한 지역 문화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예천 참외는 이 모든 문화적 배경을 엮는 하나의 감각적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예천 참외는 단순한 과일을 넘어서, 지역의 문화, 한국인의 여름 감성, 조선의 정원철학, 현대 농업의 진화를 한데 아우를 수 있는 감성 과일 콘텐츠로 완성될 수 있다. 이제 예천 참외는 ‘달콤함’만을 파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깊이와 문화의 품격,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 담은 진정한 프리미엄 농산물 브랜드로 세계를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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