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남 함평 꿀, 일제시대 농민 계몽운동 속 꿀벌 산업의 시작

insight-2007 2025. 8. 10. 23:25

전남 함평 꿀, 일제강점기 황금빛 자립의 기록

전라남도 함평은 오늘날 ‘나비의 고장’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오래된 이야기가 이 땅 속에 숨겨져 있다.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라는 가혹한 시대 속에서 함평 사람들은 쌀과 보리를 빼앗기고도 굴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벌과 꽃이 주는 작은 황금빛 방울, 즉 꿀에서 희망을 찾았다.

일제시대 농민 계몽운동 속 전남 함평 꿀

 

이 꿀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농민이 스스로 기술을 배우고 생활을 개선하는 계몽운동의 핵심 수단이었다. 함평 꿀의 시작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 실험’이었지만, 곧 지역 전체를 살린 산업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이어져 한국 양봉의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 글은 함평 꿀이 태어난 시대적 배경, 꿀벌 산업의 성장, 산업화 이후의 부활, 그리고 세계화의 가능성까지 역사적으로 조망한다.

일제강점기의 경제 수탈과 함평 꿀의 태동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의 농업 구조는 철저히 일본 중심의 수탈 경제로 재편되었다. 함평 평야에서 생산된 쌀과 보리는 조선총독부의 수탈 정책에 따라 일본으로 대규모 반출되었고, 남은 곡물로는 농민들의 생계를 유지하기조차 어려웠다. 1920년대 초반, 함평의 농민들은 굶주림뿐 아니라 빚더미와 세금 부담에 시달렸다. 바로 이 시기에 농민 계몽운동가들과 선교사, 일부 농업기술인들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바로 양봉(養蜂)이었다.
당시 꿀벌 사육은 일본에서 이미 근대적 방식으로 보급되던 산업이었지만, 조선 농민들에게는 생소했다. 계몽운동가들은 ‘토지 없이도 가능한 부업’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꿀벌 사육법을 교육했다. 초기에는 전통 통벌(토종벌)을 이용해 작은 단지나 나무통에서 꿀을 채취했으나, 점차 서양종 꿀벌과 현대식 벌통이 도입되면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1923년 함평군청과 일부 학교에서는 ‘양봉 강습회’를 열고, 농민들에게 벌통 제작, 벌 관리, 꽃밀원 조성 방법을 전수했다. 당시 교육 자료에는 “토지의 넓이에 구애받지 않고, 가을과 겨울에도 판매할 수 있는 생계 수단”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다.
함평은 지형적으로 남서해안의 완만한 구릉과 평야, 그리고 사계절 꽃이 피는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양봉에 최적지였다. 봄에는 유채와 아카시아, 여름에는 밤꽃과 야생화, 가을에는 메밀과 들국화가 차례로 피어 벌들이 쉴 틈 없이 활동했다. 이 조건 덕분에 함평 꿀은 초기부터 다른 지역보다 향과 당도가 높아, ‘농민의 금(金)’이라 불리며 거래되었다.

함평 꿀, 농민 계몽운동의 핵심 자립 모델

일제강점기 후반, 농민 계몽운동은 단순한 문맹 퇴치나 민족 의식 고취를 넘어, 실질적인 생활 개선과 생계 수단 확충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중심에 함평 꿀이 있었다. 꿀벌 사육은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고, 초기 투자비가 적으며, 토지 면적이 넓지 않아도 가능했다. 특히 부녀자들은 집 근처에서 벌을 돌보며 꿀을 채밀했고, 청년들은 벌통 제작과 꽃밭 조성에 힘썼다.
함평 꿀은 생산 과정부터 판매까지 지역 공동체의 협동 구조를 형성했다. 농민들은 품앗이 방식으로 벌통을 관리했고, 채밀 시기는 공동으로 정해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했다. 이렇게 모인 꿀은 장날 함평장이나 목포, 광주 등 인근 도시 장터에 판매되었고, 일부는 일본 상인에게 높은 값에 팔렸다.
1929년 ‘함평양봉조합’이 설립되면서 꿀벌 산업은 체계적인 유통망을 갖추게 되었다. 조합은 벌통 제작 지원, 병충해 예방 교육, 꽃밀원 확대 사업을 진행했고, 꿀병과 포장 방식도 표준화했다. 이 시기 함평 꿀의 명성은 전남뿐 아니라 경성(서울)까지 알려졌다.
함평 꿀의 품질은 채밀 시기와 밀원식물에 따라 달랐다. 5월의 아카시아 꿀은 맑고 은은한 향이 특징이었고, 6~7월 밤꿀은 진한 호박색과 묵직한 단맛을 가졌다. 가을의 메밀꿀은 짙은 갈색에 약간의 쌉쌀한 뒷맛이 있어 약재용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러한 다양한 맛과 색은 함평 꿀을 ‘다품종 고급 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산업화의 그늘과 함평 꿀의 부활

1970년대 이후,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로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이동했다. 함평도 예외가 아니었고, 꿀벌 산업은 한때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함평의 일부 장인들은 대를 이어 벌을 길렀고, 토종벌 보존과 자연 채밀법을 지켰다.
1990년대 들어 건강식품과 웰빙 열풍이 불면서 함평 꿀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함평군은 ‘함평 꿀 명품화 사업’을 추진하며 다음과 같은 전략을 펼쳤다.

  • 품종 고급화: 아카시아·밤·메밀 등 주요 밀원꿀을 구분 채밀해 브랜드화
  • 전통 채밀법 복원: 인위적 열처리나 설탕 급여를 최소화하여 자연 숙성 꿀 생산
  • 품질 인증제 도입: 함평 꿀 전용 라벨과 생산자 이력제를 도입해 소비자 신뢰 확보
  • 6차 산업 결합: 꿀벌 체험관, 꿀 디저트 카페, 양봉장 투어 등 관광·체험과 연계

특히 함평 나비축제와 연계한 ‘꿀벌 마을’ 프로그램은 가족 단위 관광객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관람객은 직접 채밀을 체험하고, 계절별 꿀 맛을 비교하며, 벌과 꽃의 생태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이는 단순한 판촉 행사가 아니라, 함평 꿀의 역사와 생태를 소비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문화 콘텐츠로 발전했다. 또한 함평은 전국 최초로 ‘토종벌 복원사업’을 본격화해 기후변화와 병충해에 강한 벌을 보급했다. 이는 단기 수익보다 장기적인 산업 기반을 강화하는 전략이었다.

세계로 향하는 함평 꿀, 역사와 문화가 만든 프리미엄 브랜드

오늘날 함평 꿀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를 품은 프리미엄 K-푸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건강과 천연식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 꿀의 효능(면역력 강화, 항균, 항산화)이 각광받는다. 함평군은 이를 기회로 삼아 미국, 일본, 동남아, 중동 등지에 수출망을 확대하고 있다.
세계화 전략의 핵심은 스토리텔링이다. “일제강점기, 땅을 잃은 농민들이 벌을 길러 자립의 길을 찾았다”는 서사는 단순한 상품 설명을 넘어, 자유와 자존의 상징이 된다. 이 스토리를 담은 포장 디자인에는 함평의 나비, 밀원식물, 전통 양봉 장면, 계몽운동의 기록 등이 어우러진다.
또한 함평 꿀은 다양한 융합 콘텐츠로 확장되고 있다.

  • 한식 디저트와 결합: 꿀 인절미, 꿀약과, 꿀수정과 등 전통 디저트에 활용
  • 전통주 개발: 함평 꿀로 발효한 꿀술, 하니와인 등 고급 주류 시장 진출
  • 교육·관광 연계: 꿀벌 생태 교육, 어린이 양봉 캠프, 해외 관광객 대상 체험 프로그램

향후 함평 꿀이 세계 시장에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려면, 기후변화 대응 품종 개발, 스마트팜 기반 벌 관리, 국제 품질 인증 획득이 필수다. 동시에 브랜드 메시지는 ‘달콤함 속의 역사’로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결국 함평 꿀은 한 세기 전, 농민의 삶을 지킨 황금빛 식량에서 출발해, 오늘날에는 지역과 국가의 문화를 세계에 전하는 고급 식품이 되었다. 그 달콤함은 단순한 맛이 아니라, 역경 속에서도 피어난 자립과 연대의 정신, 그리고 사람·벌·꽃이 함께 써 내려간 한 세기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