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정원에서부터 시작된 노란 과일의 기원
경상북도 성주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참외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햇살 좋은 들녘에 노랗게 익어가는 참외는 봄과 여름을 알리는 대표적인 과일이며, 전국 참외 생산량의 70% 이상을 성주가 차지할 정도로 지역 경제와 문화의 중심 품목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노란 과일이 단순한 지역 농산물을 넘어, 깊은 역사적 뿌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성주의 참외 재배 역사는 그 기원이 무려 신라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 시대 기록에 따르면, 성주 지역은 신라 왕실의 별궁이 위치했던 곳으로, 궁궐 정원에서 귀한 과실이 재배되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중 참외는 왕실의 후원(後苑), 즉 정원에서 특별히 가꾸어졌던 여름 과일로 여겨졌으며, 그 유래가 지역 전통 속에 오랜 세월 스며들어 오늘날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이 글에서는 성주 참외가 어떻게 신라의 정원 문화 속에서 왕실 과일로 등장했으며, 그 후 조선 시대 농업과 식문화, 그리고 현대 농산물 브랜드로 확장된 과정을 역사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신라 왕실과 성주의 정원문화 – 참외의 첫 자취를 찾아서
신라는 경북 경주를 중심으로 화려한 궁궐과 정원문화를 발전시켰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진덕여왕이 각지에서 귀한 약초와 과실을 궁궐 안의 후원(後苑)에 심게 했으며, 『삼국유사』에는 “성산(星山)에 궁을 짓고 그 주변에 과실과 채소를 심었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여기서 ‘성산’은 오늘날의 성주와 지리적으로 연결되며, 신라 왕실이 후궁으로 활용했던 별궁터와 정원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왕실은 외국 사절이나 귀빈을 접대할 때, 정원에서 자란 귀한 과실을 상에 올리는 문화를 중시했으며, 여름철에 제공되던 대표 과일로 참외, 오이, 수박, 복숭아 등이 언급된다. 특히 참외는 더위를 식히고, 입맛을 돋우며, 몸을 맑게 해주는 ‘여름 보과(寶果)’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신라 귀족들은 성주 일대의 강가와 들판을 참외 재배지로 삼았으며, 그 씨앗과 재배 기술은 점차 민간으로 전파되었다.
『해동역사』에는 “성주 지방의 과일 중 참외는 향과 색이 특히 뛰어나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이는 곧 신라 왕실 정원의 전통이 지역 농업으로 이어졌음을 보여주는 문헌적 근거가 된다. 이처럼 성주 참외는 단순히 옛 작물의 후손이 아니라, 신라 왕실 정원에서 시작된 귀한 과일이라는 문화적 기원을 지니고 있는 유서 깊은 특산물이다.
조선 시대의 성주 참외 – 농업의 발달과 향토 과일의 등장
조선 시대에 들어서면서 성주 지역은 농업 중심의 고을로 자리 잡았고, 참외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여름 작물로 꾸준히 재배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성주목(星州牧) 항목에 “참외의 향이 고아 상등품으로 치며, 조정에 진상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성주 참외가 조선 초기에 이미 품질 좋은 지역 특산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
또한 『산림경제』나 『임원경제지』와 같은 농업 백과에서도 “참외는 모래기 섞인 흙과 마른 볕, 바람이 통하는 곳에서 잘 자란다”고 하며, 성주 지역의 자연조건이 참외 재배에 알맞은 환경임을 기술하고 있다. 당시 성주 지역은 낙동강과 예천천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충적토가 쌓인 비옥한 평야지대였고, 일조량이 길고 낮과 밤의 기온차가 커 과일의 당도가 높은 조건을 갖췄다.
조선 중기부터 이 지역에서는 참외를 ‘초과(草瓜)’ 또는 ‘향과’라 불렀고, 김장 전에 절여 먹거나, 꿀에 재워 과실청처럼 먹는 문화도 확산되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성주 유생들이 참외밭을 가꾸고, 과일을 글에 인용하며, 문학 속에서도 성주 참외의 향과 맛이 귀한 여름 과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노란 그 껍질에 여름이 숨고, 단 그 살 속에 유년이 맴도네”라는 시문이 지역 문집에 남아 있다. 이처럼 조선 시대 성주 참외는 향토 과일이자 문인과 백성 모두가 사랑한 문화적 작물로서 자리를 확고히 했다.
성주 참외의 근현대사 – 농민의 삶과 지역 경제를 지탱한 과일
일제강점기에도 성주는 참외 재배지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조선총독부 농사보고서』에는 “성주군 금수면, 벽진면, 초전면 일대에서 참외가 다량 생산되어 일본으로 일부 수출된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시기에는 온실이나 하우스 없이 노지에서 참외를 재배했기 때문에 기후에 매우 민감했지만, 성주 농민들은 바람막이, 볏짚 피복, 낮은 이랑 등 다양한 전통 기술로 안정적인 생산을 이어갔다.
6·25 전쟁 이후 참외 산업은 위축되었지만, 1970년대 이후 농업 기계화와 하우스 재배 기술의 보급으로 다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성주군은 국내 최초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조기 참외 재배를 전면 도입, 봄철 고소득 작물로 참외가 부각되면서 성주 농촌 경제를 지탱하는 중심 품목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성주 참외는 단지 경제적 작물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밭을 일구고, 수확과 선별을 함께하며 세대를 잇는 공동체 기반 작물로 발전했다. 지금도 성주에서는 한 가족이 2대, 3대에 걸쳐 참외 농사를 짓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성주 참외는 지역민의 삶과 농업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 간 과일로, 단순한 작물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현대의 브랜드화와 성주 참외의 문화 유산화
오늘날 ‘성주 참외’는 지리적 표시제 제10호로 등록되어 있으며, 국내에서 가장 잘 알려진 프리미엄 과일 브랜드 중 하나다. 성주군은 매년 봄 ‘성주 참외축제’를 개최해, 농산물 직거래는 물론 참외 체험, 참외 요리 경연, 참외 미술 전시 등 참외를 중심으로 한 지역 축제 문화를 활발히 전개하고 있다. 또한 농촌진흥청과의 협업을 통해 ‘성주 황금참외’, ‘성주 미니참외’, ‘저당도 유기농 참외’ 등 다양한 품종을 개발, 글로벌 수출까지 염두에 둔 스마트 농업도 확대되고 있다.
무엇보다 성주는 ‘참외역사관’, ‘참외문화관’, ‘참외 테마공원’을 조성하며, 단순한 농산물 산업을 넘어 참외를 지역의 정체성으로 재정의하고 있다. 참외가 단지 먹는 과일이 아니라, 신라의 정원에서 시작되어 조선의 밥상과 문인들의 글 속에 깃든 역사적 유산임을 지역민 스스로 복원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노란 껍질 속에 담긴 시간은 천 년. 성주 참외는 오늘도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과일이자, 고요히 이어진 한국 농업사의 노란 줄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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