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밭에서 과일이 자라기 시작하던 때
딸기는 오늘날 가장 대중적인 과일 중 하나다. 상큼한 향기와 부드러운 식감, 그리고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선명한 붉은빛 덕분에 계절을 대표하는 과일 그 이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딸기가 본격적으로 재배된 건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딸기와 유사한 과일류 혹은 초기 품종군이 이미 조선 후기 농정 개혁기 즈음부터 양평을 포함한 일부 내륙 지역에서 시도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경기도 양평은 조선 시대에도 수도 한양과 가까운 전략적 곡창지대였으며, 특히 정조(正祖) 대에 들어서면서 과수 재배 실험과 농정 개혁의 시험장으로 기능한 지역 중 하나였다. 『정조실록』과 『규장전운』 등의 문헌에는 양평, 광주, 여주 일대에서 ‘작은 열매가 나는 덩굴식물’의 재배와 시식에 관한 언급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딸기’로 부르는 과실류의 전신일 수 있으며, 현대 양평 딸기의 명맥과 지역적 전통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이 글에서는 조선 후기 양평이 딸기를 비롯한 소과류 재배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적 공간이었음을 중심으로, 양평 딸기의 기원, 발전, 그리고 현재 브랜드화까지의 흐름을 역사문화 중심 콘텐츠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양평 딸기의 기원 – 정조의 과실 농정 실험과 내륙 과수 개척
조선 후기, 정조는 단순한 개혁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실학과 농업기술 발전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으며, 수원 화성을 중심으로 한 ‘이익을 백성에게 돌리는 실용 농정 개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과수 재배의 확대와 품종 다양화였다.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소과(小果)는 다산하나 다변하니, 백성의 삶에 이롭다”는 구절을 남겼다. 이 ‘소과’는 지금의 산딸기, 뽕, 들복숭아, 야생딸기류 등을 의미하며, 특히 “줄기를 따라 열리는 붉은 열매”를 언급한 부분에서는 딸기류에 대한 인식이 이미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양평은 정조가 수원과 더불어 농업 실험지로 선택했던 지역 중 하나였다. 지리적으로 한강 상류에 위치하고, 토질이 비옥하며, 경사진 밭과 계곡이 어우러져 소과류 재배에 유리한 기후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실제로 『경기읍지』에는 양평 지역에서 “초여름에 작은 붉은 과실이 난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야생 딸기 혹은 초기 재배형 딸기와 유사한 식물을 의미할 수 있다. 즉, 양평 딸기의 역사적 기원은 단지 20세기 이후의 일본 품종 도입이나 현대 육종 이전에도, 이미 지역 식물과 조선의 농업 실험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양평 딸기와 내륙 과일 문화의 형성 –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조선 말기에서 일제강점기로 넘어가는 시기, 양평 지역은 철도와 수로를 기반으로 한 내륙 교통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과일류의 상업적 재배와 가내 판매가 본격화되었고, 특히 초여름부터 출하할 수 있는 딸기, 산딸기류의 상품성이 조명되기 시작했다.
『조선총독부 농사보고서』 1925년판에는 양평 지역에서 “하천변 밭에 소과종 과일을 심고 일부는 ‘빨간 실과’로 시장에 출하함”이라는 기술이 있다. 이는 산딸기와 함께 재배형 딸기 품종이 이미 상업적 가치를 갖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이 시기 양평 주민들은 산야에서 야생 딸기를 채집하거나 소규모 밭에 심어 자체 개량을 시도했으며, 일본에서 도입된 딸기 품종 일부가 양평 지역 밭에 심겨졌다는 구술 기록도 전해진다.
양평 딸기는 일제강점기 말엽, 경성(서울)과의 근접성, 그리고 양평읍장의 성장과 함께 서울 상류층 가정으로 소량 유통되며 ‘초여름에만 맛볼 수 있는 상급 과일’로 평가받기도 했다. 즉, 양평 딸기는 한국 과수 산업 초창기에 자생과 외래 품종의 교차점에서 자연스럽게 정착한 대표적인 내륙형 딸기 재배지로 성장해 왔다.
양평 딸기의 부흥 – 현대 브랜드화와 생태적 특산물로의 확장
현대에 들어 양평 딸기는 다시 주목받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비닐하우스 조기재배 시스템과 품종 육종 기술 발전에 힘입어, 양평군은 경기 내에서 딸기 품질이 뛰어난 지역 브랜드로 성장했다.
현재 양평군에서는 ‘양평딸기연합회’를 중심으로 ‘설향’, ‘죽향’, ‘금향’ 등 고당도 품종을 재배하며, 특히 친환경 재배 방식과 저농약 인증을 받은 농가가 다수다. 이는 서울 근교 프리미엄 과일 소비 시장과 잘 맞아떨어지며, 양평 딸기의 고급화 전략을 뒷받침하고 있다.
양평군은 매년 ‘양평 딸기축제’를 개최해 딸기 수확 체험, 딸기 디저트 클래스, 딸기 요리 대회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역 학생을 대상으로 ‘딸기 역사와 식문화 수업’을 병행해 농업과 교육, 관광을 아우르는 융복합 콘텐츠를 키우고 있다. 특히 양평 딸기는 단지 맛과 품질을 넘어, ‘서울과 가까운 역사적 과일 재배지’라는 스토리텔링 요소가 강한 특산물이기 때문에 향후 지역 농업 콘텐츠 자산으로도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양평 딸기에 담긴 역사와 미래 – 농정 개혁의 흔적에서 문화 자산으로
양평 딸기는 단지 근대 이후 외래 품종의 성공 사례가 아니다. 그 뿌리는 정조 시대 농정 개혁이라는 조선 후기의 실험정신에서 비롯되었고, 내륙 지역 과수 산업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실현한 공간적 자산이기도 하다.
오늘날 양평 딸기는 도시 인근 고품질 과일의 상징, 친환경 농업의 모델, 그리고 문화·교육·관광이 어우러진 다층적 지역 콘텐츠로 진화하고 있다. 딸기 한 송이 안에는 단지 단맛뿐만 아니라 조선의 농업 개혁, 민중의 재배 노력, 식문화의 변화, 지역의 자긍심까지 함께 담겨 있다. 양평 딸기는 오늘도 붉은 빛을 머금고 지난 200년간의 농업과 문화를 조용히 증명하고 있는 살아 있는 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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