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남 고흥 유자, 천혜의 기후가 빚은 황금 향기의 비밀

insight-2007 2025. 6. 26. 17:32

고흥 유자, 자연과 문화가 함께 피워낸 노란 향기

전남 고흥은 그 자체로 하나의 문화다. 온화한 해양성 기후, 맑은 바람, 적당한 습도, 그리고 바다 내음이 감도는 이곳에서는 매년 겨울이 다가올 무렵, 고흥 유자가 노랗게 익는다. 유자는 그냥 열리는 과일이 아니다. 이곳 사람들은 유자나무에 물을 줄 때도, 가지를 손질할 때도 마치 자식을 다루듯 정성을 다해 돌본다. 그래서 그런지 고흥 유자의 향기는 특별하다. 다른 유자보다 향이 진하고 껍질은 단단하며, 씹을수록 알싸하고 시원한 풍미가 살아 있다.

 

전남 고흥 유자 천혜의 기후가 빚은 황금 향기

 

사람들은 종종 유자차나 유자청만을 떠올리지만, 고흥 유자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그것은 고흥이라는 땅이 수백 년간 사람들과 함께 만들어온 생산의 문화이자, 계절의 전통이며, 생활의 미학이다. 고흥 유자에는 이 지역이 쌓아온 시간, 기억, 그리고 사람들의 애정이 녹아 있다.

유자의 도입과 고흥이라는 땅이 그 열매를 받아들인 과정

유자는 원래 중국 남부가 원산지다. 고려 말 또는 조선 초 무렵, 유자가 남해안을 통해 한국에 처음 전해졌을 때,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이 과일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고흥만은 달랐다. 고흥은 따뜻한 기후, 해풍, 비교적 건조한 겨울 덕분에 유자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고흥 주민들은 유자나무를 단순한 작물로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유자를 약으로 사용했고, 제사 음식으로 올렸으며, 어린 자식에게 감기 기운이 돌면 유자즙을 따뜻한 물에 타 먹이기도 했다. 유자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장하며, 조선시대 관청에 바치는 지방 특산물 목록에 유자가 포함되기도 했다.
하지만 고흥 유자는 단순히 “기후에 적합했다”는 조건만으로 성장한 것이 아니다. 지역 공동체의 협력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집집마다 유자나무 한 그루쯤은 있었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수확 시기가 되면 서로 손을 보태 가며 유자를 땄다. 어린아이들은 유자 따는 날이 가까워지면 바구니를 들고 따라다녔고, 수확한 유자는 대부분 유자청으로 만들어 겨울 한철 내내 나눠 먹었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생산이 아닌, 공동체 문화의 일부였다. 유자는 그렇게 이 지역에서 생활문화이자 신앙, 그리고 관계의 열매로 자리 잡았다.

고흥 유자의 향기, 전통 속 삶의 리듬을 닮다

고흥 사람들에게 유자의 향기는 곧 계절의 냄새다. 유자꽃이 피는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 마을에는 은은한 단향이 퍼지고, 11월이 되면 유자의 노란빛이 밭을 가득 메운다. 이런 변화는 단지 경관적인 아름다움으로 그치지 않는다. 유자는 고흥의 삶의 리듬과 맞물려 있다. 과거 고흥에서는 유자꽃 피는 날을 기준으로 농사의 시작을 알렸고, 수확이 끝나면 마을에서 작게나마 잔치를 열었다. 농사와 축제, 식생활이 유자를 중심으로 순환했던 셈이다.

문화적으로도 유자는 다양한 형태로 응축되어 왔다. 고흥에서는 유자와 관련된 민간요법이 오랫동안 전해졌는데, 유자 껍질을 말려 베개 속에 넣으면 숙면에 도움이 된다거나, 유자껍질과 생강을 섞어 담근 유자청은 겨울 감기를 막는다는 믿음도 있었다. 유자는 또 음식을 장식하는 식재료로도 사용되었으며, 추운 겨울 제사상에 올리는 유자나무 잎은 고흥에서 ‘복을 부르는 식물’로 여겨졌다. 특히 유자의 짙은 노란빛은 예로부터 풍요와 복을 상징했기 때문에, 설 명절이나 혼례 때 유자를 사용한 요리나 장식이 선호되었다. 유자는 그렇게 고흥 사람들의 의식주에 골고루 스며든 전통의 상징이 되었다.

유자가 만들어낸 지역 정체성

오늘날 전남 고흥은 전국 유자 생산량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대표적인 유자 산지다. 하지만 고흥 유자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생산량이 많아서가 아니다. 이 지역에서는 유자를 하나의 문화적 자산이자 정체성의 상징으로 인식하고 있다. 고흥군은 매년 가을 ‘고흥 유자축제’를 열고 있다. 이 축제에서는 유자 따기 체험, 유자 가공식품 전시, 유자 요리 시연, 유자 화장품·비누·에센셜 오일 등의 제품 판매까지 함께 진행되며, 단순한 농산물 축제를 넘어 지역 문화를 경험하는 종합 문화행사로 자리 잡았다.

고흥 주민들은 단지 유자를 재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자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이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려 한다. 유자밭을 개방해 체험객을 맞이하고, 집집마다 유자청을 담가 나누는 문화도 아직 살아 있다. 유자의 향은 고흥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적 기호가 되었고, 그 향기를 통해 이 지역의 계절과 온기가 외지인들에게도 전달된다.

하지만 고흥 유자 산업이 안고 있는 현실적 과제도 있다. 농가의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청년 인력의 유입은 매우 더디다. 유자 수확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뤄지며, 노동 강도가 높아 젊은 세대에게는 진입 장벽이 높게 느껴진다. 이에 고흥군은 유자 스마트팜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청년 귀농인을 위한 창업 자금과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 인력 확보에 나서고 있다. 또한 지역 브랜드를 강화하기 위한 유자 마케팅과 로컬푸드 인증 확대, 유자 활용 관광 코스 개발 등도 함께 추진 중이다.

이 모든 노력의 바탕에는 고흥 주민들이 유자에 담긴 문화적 가치와 세대 간 연속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고흥 유자를 지키는 힘은 단지 행정이나 경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향기로운 과일을 통해 지역의 이야기를 다음 세대에게 전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다. 유자는 이제 하나의 과일을 넘어, 지역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살아 있는 문화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