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충남 공주 밤,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고유 품종의 뿌리를 찾아서

insight-2007 2025. 6. 27. 20:54

공주의 밤은 왜 ‘역사’로 남았을까?

충남 공주는 역사와 전통의 도시다.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 유교 종가 문화의 중심지, 그리고 지금은 전국적인 특산물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공주 밤’은 지역 정체성을 대표하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많은 이들이 가을이 되면 마트에서 공주 밤을 쉽게 만날 수 있지만, 그 밤이 어디에서 왔고 왜 특별한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충남 공주 밤 백제시대부터 내려온 고유 품종


공주 밤은 단순한 견과류가 아니다. 그 안에는 백제 시대부터 이어진 재배 전통, 조선 유교 문화 속의 의례적 역할, 그리고 현대의 품종 계승과 지역 산업화 과정까지 긴 역사가 응축돼 있다.
이 글에서는 공주 밤이 단순히 ‘맛있는 농산물’이 아니라, 한국의 고대사와 농업문화, 제례문화가 살아 숨 쉬는 특산물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백제의 농업과 밤나무 재배의 기원

공주의 밤 재배 역사는 백제 웅진시대(475~53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도 특히 정원, 과수, 조경 문화가 발달한 나라였고, 당시 수도였던 공주(웅진)는 지리적 조건이 농업에 유리했다.
계룡산과 금강이 만나는 이 지역은 산비탈과 구릉지가 넓게 분포하며, 밤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배수성과 토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왕들이 궁궐 주변에 밤나무, 대추나무, 무화과 등을 심어 과수원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간접적으로 나타나며, 『일본서기』에서는 백제에서 일본으로 밤나무 품종이 전래되었다는 언급도 있어, 백제 밤의 품질과 명성이 이미 고대 동아시아에서 통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현재 공주시 내 구룡동, 탄천면, 반포면 일대에는 100년 이상 된 고목 밤나무들이 다수 존재하며, 일부는 조선 후기 이전부터 자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유서 깊은 밤나무 군락지는 단순한 과수원이 아니라, 한반도 밤 재배 문화의 살아 있는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고대 공주의 밤은 궁중의 진상품이었고, 왕실 제사상에 오를 만큼 귀한 작물이었다. 밤은 단단한 껍질 덕분에 장거리 운송이 가능했고, 건조 및 저장이 쉬워 공물로서도 각광받았다. 따라서 백제 말기에서 통일신라 시기까지도 공주 밤은 지역 경제와 국가 체계에서 중요한 자원을 이룬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조선시대 공주 밤의 위상과 유교적 제례 문화

조선시대에 이르러 공주는 충청도의 중심 지역으로 부상하며, 밤나무 재배도 조직적으로 확대된다. 특히 유교 문화가 뿌리내린 공주에서는 종가 문화와 함께 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의 지리서에는 공주 지역이 밤의 산지로 명시되어 있으며, 매년 공주 밤이 왕실로 진상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조선 왕실은 밤을 귀하게 여겨 제례, 진상품, 약용, 그리고 선물용으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공주 지역에서는 밤을 단순한 식재료가 아닌 의례를 구성하는 구성품으로 인식했다. 제사상에 올라가는 밤은 ‘둥글고 흠 없는 것’이 이상적이라 여겨졌으며, 껍질을 벗기거나 조림을 할 때에도 고유한 방식이 전해졌다. 종갓집에서는 가을 수확 후 가장 먼저 선조의 차례상에 밤을 올렸고, 이후 밤묵, 약밥, 밤조림 등 다양한 형식으로 의례 음식에 응용되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공주알밤’이라는 명칭이 지역 유통망을 통해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오일장에서는 공주 밤이 별도의 품목으로 거래되었고, 지역 유생이나 양반들이 밤을 사고팔며 밤 재배를 경제활동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밤은 부피에 비해 에너지 밀도가 높아 군량미 대용으로도 이용되었으며, 유사시 비축 식량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즉, 공주 밤은 종교적, 경제적, 실용적 가치를 동시에 지닌 고유 품종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다.

현대 공주 밤 산업의 발전과 품종 보존 노력

현대에 들어서면서 공주 밤은 전국적으로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특히 ‘공주알밤’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밤 품종은 과육이 쫀득하고 당도가 높으며, 껍질이 잘 벗겨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 소비자들에게 선호도가 매우 높다. 공주시는 이러한 전통 품종을 보존하고 산업화하기 위해 ‘공주 밤 산업 특구’를 조성했고, 지역 농업기술센터와 협력하여 토종 밤나무 DNA 분석 및 재배지 데이터화 작업도 진행 중이다.

또한 밤을 활용한 가공식품 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밤양갱, 밤술, 밤빵, 밤잼 등 지역 브랜드 상품이 전국적으로 유통되고 있으며, 밤을 주제로 한 카페나 체험 농장도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매년 가을 개최되는 ‘공주 알밤축제’는 지역민과 관광객이 함께 밤을 줍고, 삶고, 먹고, 즐기며 밤 문화를 오감으로 체험하는 살아 있는 민속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공주는 밤을 단순히 경제자원으로 보지 않는다. 지역 문화재단과 마을 공동체는 오래된 밤나무를 중심으로 ‘밤나무 보호마을’, ‘전통 수확 방식 전승 사업’, ‘밤 채취 시기 공동관리 조례’ 등을 운영하며, 밤 문화를 세대 간에 이어가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밤 수확은 여전히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고, 마을 어르신들은 어린이들에게 밤 줍는 법과 보관하는 법, 그리고 밤과 함께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밤이라는 열매에 담긴 시간과 기억의 지속

공주 밤은 단지 맛있어서 유명해진 농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 역사에서 왕조가 흥망해도 자리를 지켰고, 시대가 바뀌어도 계절마다 열매를 맺으며 살아남은 ‘문화적 생명체’다. 백제의 왕들이 사랑했던 과일, 조선의 선비들이 제사상에 올렸던 귀한 식재료, 일제강점기에도 마을 공동체가 지켜낸 자산, 그리고 오늘날 공주의 이름을 알리는 브랜드.
밤 한 알에는 이런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밤을 재배하고, 수확하고, 함께 나누는 과정은 단순한 농사가 아니라, 기억을 계승하는 행위다. 공주 밤이 가진 진짜 가치는 그 깊은 역사와 문화적 상징성에 있으며, 이는 우리가 단지 맛이나 상품성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차원이다.
지금 우리가 맛보는 밤은 어쩌면 백제 시대 농부가 심은 그 씨앗의 후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공주 밤을 먹는다는 것은, 과거와 연결되는 한 조각의 의식이자, 살아 있는 전통에 참여하는 행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