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특산물의 역사

전북 임실 치즈, 한국에서 유럽 치즈를 만들게 된 사연

insight-2007 2025. 6. 27. 23:58

치즈와 농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합의 기적

치즈 하면 우리는 흔히 유럽을 떠올린다. 프랑스의 브리치즈, 이탈리아의 모짜렐라, 네덜란드의 고다치즈처럼 서양 문화에서 발전한 유제품을 한국의 농촌에서 생산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전라북도 임실은 이 불가능해 보였던 일을 현실로 만든 곳이다.

 

전북 임실 치즈 한국에서 유럽 치즈


‘임실 치즈’는 단순한 지역 특산품이 아니다. 그 안에는 1960년대 한국 농촌의 열악한 현실, 한 외국인 신부의 결단, 그리고 농민들의 땀과 협력이 녹아 있다. 임실 치즈는 한국 낙농업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자, 유럽 치즈가 한국인의 식탁에 자리 잡기까지의 감동적인 시작점이었다.
이 글에서는 임실 치즈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문화적·역사적 맥락을 거쳐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게 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외국인 신부 한 사람이 바꾼 임실의 운명

임실 치즈의 시작은 1964년, 벨기에 출신의 가톨릭 신부 ‘디디에 세스테벤스’(한국명 지정환)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는 전북 임실에 부임하면서 당시 극심한 가난과 생계난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했다. 지정환 신부는 단순한 선교가 아니라 지역민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생계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는 고향인 벨기에에서 어린 시절부터 접해온 낙농업과 치즈 제조 경험을 떠올렸다. 당시 한국에서는 우유 소비조차 흔치 않았고, 치즈는 생소한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국형 치즈 산업이라는 미래를 보고, 임실에 염소를 들여와 우유를 짜고, 이를 발효시켜 치즈를 만드는 실험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농민들의 반응이 냉담했다. “누가 이런 걸 먹냐”는 반응부터, 우유 비린내를 참지 못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신부는 포기하지 않고, 하나하나 직접 보여주고 설명하며, 치즈 제조 교육을 공동체 단위로 시행했다. 주민 몇 명이 동참했고, 점차 우유의 품질이 안정되며 치즈가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선 ‘임실 치즈 공장’이 정식으로 문을 열게 되었고, 이곳에서 생산된 치즈는 국내 최초의 국산 치즈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단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가난했던 시골 마을 전체를 변화시키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임실 치즈가 품은 문화적 의미와 농업 공동체의 혁신

임실 치즈는 단순히 새로운 식재료의 도입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농촌 지역의 공동체 재생 모델이자, 외래 문화를 토착화시킨 최초의 성공 사례로 평가된다.
당시의 한국 농촌은 대부분 가족 단위의 소규모 자급농이 중심이었고, 낙농업이나 유제품 가공에 대한 이해는 매우 부족했다. 지정환 신부는 단지 치즈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조합 형태의 협동조합을 조직해 공동 생산, 공동 수익 분배라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농민들에게 지속적인 소득원을 제공했으며, 자녀들의 교육비, 의료비를 감당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었다.

문화적으로도 임실 치즈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한국인의 식탁은 전통적으로 발효와 저장 음식 중심이었고, 치즈처럼 서구식 유제품은 생소한 존재였다. 그러나 임실 치즈는 그 특유의 담백하고 부드러운 맛으로 한국인의 입맛에 서서히 적응해갔고, 김치와의 궁합, 떡과의 조화 같은 새로운 조리법이 등장하면서 ‘한국식 치즈 소비 문화’가 형성되는 시초가 되었다.

또한 임실 치즈는 학교 급식, 군대 보급품, 호텔 뷔페 등 다양한 경로로 확산되며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고, 이 과정에서 ‘국산 치즈는 임실’이라는 브랜드 이미지가 고착되기 시작했다. 이는 단순히 지역 명칭을 따서 만든 브랜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지역 공동체가 만들어낸 이야기와 전통의 힘이었기에 설득력을 가졌다.

전통과 산업, 브랜드를 동시에 키운 임실 치즈의 진화

1980년대 이후 임실 치즈는 단순한 수공예 제품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산업화 단계로 진입했다. 임실군은 치즈 산업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지역 내 낙농 인프라를 확충하기 시작했으며, ‘임실치즈농협’을 중심으로 유통망과 가공시설이 체계화되었다. 치즈 품종도 단순한 자연치즈에서 피자용 모짜렐라, 체다, 크림치즈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고, 국내 프랜차이즈 피자 업계에서도 ‘국산 치즈’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는 ‘임실N치즈’라는 공식 브랜드가 탄생하면서, 문화 산업과의 결합도 활발해졌다. ‘임실 N 치즈 축제’는 전국에서 수만 명이 찾는 인기 축제로 자리 잡았고, 축제에서는 치즈 만들기 체험, 낙농 투어, 농촌문화 공연 등 다채로운 행사가 열려 관광과 지역경제를 함께 견인하고 있다.
또한 임실 치즈는 ‘슬로푸드’ 운동의 국내 대표 사례로 평가받으며, 수제 발효식품의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데에도 앞장서고 있다.

이제 임실은 단순한 치즈 생산지를 넘어, 치즈로 지역을 설계한 대표적인 사례로서 한국 지역 브랜딩의 모범이 되었다.
디디에 신부가 세운 치즈공장은 현재 ‘지정환 치즈역사관’으로 리모델링되어, 매년 수천 명의 방문객이 찾아와 한국 농업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하는 장소가 되었다.

치즈는 유럽에서 왔지만, 임실에서 자랐다

임실 치즈의 역사는 단지 외래 문화 수입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문화를 공동체가 스스로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소화하고, 발전시킨 하나의 전통 형성 과정이었다. 지정환 신부가 씨앗을 뿌렸고, 농민들이 함께 물을 주었으며, 그 열매는 ‘임실 치즈’라는 이름으로 한국 식문화의 일부가 되었다.

임실 치즈는 이제 국내 치즈 시장의 약 30%를 점유하며, 일본, 동남아시아 등으로의 수출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성공은 그 생산량이 아니라, 이 치즈를 통해 임실이라는 시골 마을이 하나의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치즈 한 조각을 입에 넣을 때, 우리는 단지 유제품을 먹는 것이 아니라, 60년 전 가난한 시골 마을에 치즈를 만들겠다던 사람들의 꿈, 그리고 그 꿈을 지켜온 마을 사람들의 땀을 함께 맛보는 셈이다.

임실 치즈는 한국 농업의 위기 속에서 문화와 경제, 공동체를 동시에 살려낸 살아 있는 기념비이며, 지금도 그 이야기는 진행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