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복분자, 여름이면 부엌에서 피어나는 부녀자의 약선 지혜
전라북도 고창은 지금도 ‘복분자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진한 빛의 오디 같은 열매가 단순한 여름철 과일을 넘어, 오랜 세월 마을 여성들이 여름철 기력 회복과 가족의 건강을 위해 활용한 대표 약선 음식 재료였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복분자(覆盆子)는 원래 산딸기과 식물 중에서도 약성이 강하다고 알려진 종으로, 『동의보감』에는 신장과 간, 자궁 건강에 효과가 있으며, 여성의 기혈을 보충하는 데 탁월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창은 예부터 이 복분자가 자생하는 기후와 토질을 갖춘 천혜의 지역으로, 마을 어귀와 산기슭, 논둑길 곳곳에 자생하는 복분자 열매를 부녀자들이 약차, 약밥, 청으로 만들며 여름철의 기력을 보충해온 풍속이 전해진다. 특히 고창에서는 조선 후기부터 여름에 아이를 기르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주부들이 복분자 효소나 탕약을 직접 달여 가족의 건강을 챙겼고, 때로는 이것이 여성들끼리의 정보 교류와 정서적 연대의 상징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복분자는 단순한 산열매가 아니라, 계절의 순환과 여성의 몸, 가족의 건강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였던 셈이다. 이 글에서는 고창 복분자가 어떻게 민간 약초로서 지역에 뿌리내렸고, 왜 여성의 손에서 여름 약선 음식으로 꽃피웠는지, 그리고 이 전통이 오늘날 지역 특산물 산업으로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역사 중심으로 조명해 본다.
복분자의 역사적 약효 인식과 조선 후기 의서 속 기록
복분자(覆盆子)는 고대 중국 한의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의 의서들에 다수 등장하는 전통 약초다. 『동의보감』에는 복분자를 “오줌이 잦은 증상을 멈추게 하며, 정기를 보하고 신장을 따뜻하게 하여 정수(精水)를 맑게 한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향약집성방』에는 “복분자는 간을 편안하게 하고, 허리와 무릎이 시큰한 증상을 낫게 하며, 여성의 기혈 허약에 좋다”고 정리돼 있다.
복분자는 남성 정력에만 국한되지 않고, 여성의 월경불순, 산후 회복, 장 기능 저하를 회복하는 민간약재로도 널리 쓰였다. 흥미롭게도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복분자를 진상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과 『선조실록』에는 전라도 관찰사 혹은 고을 수령이 복분자나 그 효소(당장숙약)를 여름철 왕실에 올렸다는 내용이 보이며, 이는 복분자가 단순한 산과일이 아니라 여름철 보양약으로 인식됐다는 결정적 증거로 해석된다.
고창 일대는 조선 후기까지도 변산반도와 함께 ‘전라 좌도 남방의 자생 약초지대’로 분류되었으며, 고창 복분자는 전주, 정읍, 해주 등과 함께 약용과일 공급지로 조선 중기부터 문헌에 종종 등장한다. 『농가집성』이나 『임원경제지』에서도 “여름 해독에는 복분자를 다려 먹는 것이 으뜸이며, 시골 아낙네들이 이를 청으로 만들어 겨울까지 보관한다”는 구절이 있어, 복분자가 18세기 말~19세기 초 전라도 여성의 식생활과 약선 음식 문화에 이미 깊이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창의 자연조건과 복분자의 토착화
고창은 서해와 인접한 해양성 기후를 지니면서도, 내륙성 기후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아 일교차가 크고 여름이 덥고 습한 편이다. 이러한 환경은 복분자 같은 야생 열매가 자생하기에 매우 적합하다. 복분자는 원래 산비탈, 둑, 냇가 등지에서 자생하던 식물이었으며, 고창에서는 논두렁·밭두렁·야산에 자생하는 복분자 덩굴을 부녀자들이 수확해 약초로 이용하던 전통이 남아 있다.
고창의 토양은 황토 기반으로 배수가 잘 되고, 미네랄 성분이 풍부하여 복분자의 당도와 안토시아닌 함량이 높게 유지되는 환경을 제공한다. 이런 조건 속에서 자연 상태로 자라던 복분자는 점차 가정식 음료, 약용 식품, 정월 음식의 재료로 자리잡게 된다. 특히 고창에서는 5월 말~6월 중순 사이 복분자 수확철이 되면, 여성들이 삼삼오오 모여 뒷산이나 논가에서 복분자를 따고, 이를 청으로 담거나 효소 발효시켜 가정에서 보관하는 문화가 형성됐다. 이 시기는 모내기철과 겹쳐 농번기의 피로가 심한 때이기도 했기에, 복분자는 자연스레 여성들의 건강 보조식이자 여름철 필수 보양식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복분자는 고창 여성들에게 몸을 회복시키는 열매이자, 여름을 견디는 자연 속 의약이었다.
전통 조리법과 역사 속 고창 여성의 부엌에서 살아난 복분자 문화
복분자는 고창 지역 여성들의 손에서 조리되고 저장되며 전통 식문화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여름 약선 재료였다.
조선 후기 편찬된 『향약집성방』과 『임원경제지』에는 “복분자는 설탕과 약재를 더해 항아리에 숙성시킨 뒤 해기(解氣)에 좋다”며, 더위와 기력 저하에 쓰이는 저장약으로의 사용법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기록은 복분자가 단순한 생과일이 아닌, 조리·발효·저장이라는 복합 과정을 거쳐 활용된 약선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특히 전라도 남부 지방에서는 복분자 활용 방식이 지역화되며, 부녀자들의 부엌 중심 노동으로 정착했다.
『농가월령가』 전라도편에는 6월 농번기 무렵, “여인들이 들에서 딴 검은 열매를 장독에 담고, 겨울에도 약수로 꺼내 쓴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이는 복분자의 전통 청(淸) 제조를 묘사한 구절로 해석된다. 이 시기의 고창 여성들은 복분자를 설탕 또는 조청과 함께 항아리에 담아, 장기 보관이 가능한 자연 발효 음료나 식초, 탕약 형태로 활용하는 기술을 구전과 실습을 통해 익혔다.
근대기에도 복분자 활용은 이어졌다. 1937년 조선총독부 발간 『조선농사개량서』에는 “복분자 열매는 항염 작용이 있으며, 남부 산지에서 여성들이 주로 가공하여 청으로 만들고 있다”는 기술이 확인된다. 이는 복분자 활용이 지역 여성 주도의 경제 활동이자 전통 지식의 실천으로 기능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고창의 복분자 문화는, 단순한 민속 음식이 아니라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여성 중심 약선 지식의 실용적 집약이었다.
복분자청, 복분자죽, 복분자 시럽 등은 단순한 음료나 조미료가 아닌, 여성의 건강과 가족의 생존을 지켜낸 부엌의 지식이자 살아 있는 조리 기술이었다.
현대 고창 복분자 산업과 전통의 계승
현재 고창은 복분자 생산량 전국 1위를 차지하는 대표 산지이며, ‘고창 복분자’는 지리적 표시제 등록이 완료된 지역 브랜드로 국내외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고창군은 복분자를 중심으로 청, 잼, 즙, 와인, 아이스크림, 발효식초, 화장품, 기능성 보조제 등 6차 산업 제품을 적극 개발하고 있으며, ‘고창 복분자 축제’를 통해 전통 복분자청 만들기 체험, 복분자 음식 전시, 부녀자 요리 시연회 등을 운영하면서 지역 여성의 전통적 역할과 문화를 함께 조명하고 있다. 또한 농업기술센터와 여성회관에서는 복분자 전통 발효법, 민속 음료 제조법, 복분자 약선 조리 교육을 정기적으로 운영하여, 이 전통이 현대 여성들과 젊은 세대에게도 전수되도록 힘쓰고 있다.
그 검붉은 빛깔 속에는 몸을 살리고 마음을 잇고 가족을 보듬어온 마을 부엌의 시간이 깃들어 있다. 고창 복분자는 단순히 농산물이 아니라, 고대 의서, 조선의 실록, 근대의 약초 연구까지 살아 숨 쉬는 식물학적 문화유산이자 역사적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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