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나무 아래서 말라간 시간이 고려의 새해를 물들이다
곶감은 한겨울이 되면 조심스레 꺼내 먹는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건과일이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과육 속에 쫀득한 식감과 자연의 깊은 향을 머금은 이 과일은 단순한 간식을 넘어 천년 이상 한국인의 세시와 의례, 선물 문화에 자리 잡은 상징적인 식품이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경북 상주가 있었다.
상주는 지금도 ‘곶감의 고장’으로 불리지만, 그 유래는 고려시대 조정에서 새해 첫 진상품으로 상주 곶감을 올렸던 역사적 풍속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고려시대 문헌인 『고려사절요』에는 “상주의 반건시를 12월 조정에 진상하니, 그 달콤함이 첫 선물로서 마땅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는 상주 곶감이 단순한 지역 생산품을 넘어 왕실의 예식과 정치 질서 속에서 기능했던 대표 진상품이었음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곶감은 오래도록 저장 가능하고, 음양의 조화와 기운을 상징하며, 붉은빛이 재액을 막는다고 여겨져 복과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의 과일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이 글에서는 상주 곶감이 고려시대부터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했고, 그 명성과 가치를 어떻게 이어왔는지, 그리고 현대 농업과 민속 문화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 있는지를 중심으로 깊이 있게 조명해본다.
고려 왕실의 ‘첫 선물’이 된 곶감, 그 역사적 기록의 뿌리
곶감은 본래 신선한 감을 껍질째 말려 만든 저장식품으로, 자연의 온도와 바람 속에서 수분을 서서히 빼내어 단맛과 보존성을 모두 살린 전통 지혜의 산물이다. 곶감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고려 초반이며, 특히 상주 지역 곶감이 왕실 진상품으로 채택된 기록은 12세기 중반 이후부터 확인된다.
『고려사절요』에는 “상주에서 올라온 건시의 색이 붉고 맛이 단지라, 12월 정조하례에 이를 올려 진상품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는 상주 곶감이 왕실에서 한 해의 첫날(정월 초하루)에 임금과 대신들이 주고받는 ‘신년례’의 선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곶감은 ‘마른 감’이라는 단순한 의미 이상으로, 저장성·붉은 기운·단맛·자연 건조라는 여러 요소가 상서로운 기운을 담는 음식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조선 초기 문헌인 『세종실록지리지』에도 상주 지역이 감나무의 주산지로서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품질을 유지하고 있으며, 건시로 가공해 궁중에 진상한다는 구절이 확인된다. 이처럼 상주의 곶감은 고려와 조선을 잇는 왕실 음식 문화 속에서 계절성과 길상성을 겸비한 귀한 과일로 여겨졌고, 그 배경에는 상주라는 지역의 풍토와 조선 농업 정책의 결합이 있었다.
상주, 곶감의 고장이 된 자연조건과 감 재배의 역사
상주가 곶감의 본고장으로 불릴 수 있었던 데는 기후와 토질, 재배 방식의 삼박자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상주는 내륙 분지형 지형으로 일교차가 크고 서늘한 바람이 많으며, 건조한 겨울 기후와 황토 기반의 토양이 감 재배에 이상적인 조건을 제공했다. 특히 상주 지역의 둥시 품종 감나무는 씨가 없고 과육이 단단하며 껍질이 얇아 건조에 적합했다. 이 둥시는 일제강점기부터 ‘상주 고유 품종’으로 분류되어 국책 감 연구의 기초 품종으로도 활용됐다.
또한 지역 농가에서는 감을 수확한 후 껍질을 벗기고 대나무 장대에 끼워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곶감 틀 매달기 방식’을 조선 중기부터 계승하고 있었다. 『임원경제지』에서는 “상주의 감은 곧고 단단하며 햇빛을 오래 받아 곶감으로 만들면 꿀처럼 단 맛이 난다”는 구절이 있으며, 이는 이미 조선 후기까지 상주 곶감의 품질과 명성이 전국에 널리 퍼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연조건과 재배 전통 덕분에 상주 곶감은 명절 진상품, 사대부 집안의 제물, 혼례용 과일, 약재 대용 건과일로 널리 퍼졌으며, 특히 설과 추석 때 곶감은 붉은 빛으로 복을 기원하는 길상 과일로 상차림의 중심에 자리잡았다.
곶감이 민속과 제례에 남긴 흔적 – 상징성과 생활문화
곶감은 단순히 달콤한 건과일이 아니라, 한국 민속과 의례에서 중요한 상징을 가진 과일이었다.
겨울철 신선한 과일이 귀하던 시절, 곶감은 저장성과 영양 가치, 붉은 색채와 단맛으로 인해 복을 부르고 악귀를 물리치는 식물로 간주되었다. 제사상에서는 곶감이 반드시 상단 중앙에 놓였으며, 이는 ‘감복(甘福)’ – 단맛은 곧 복이라는 언어적·상징적 해석과도 연결된다. 또한 어린이에게 곶감을 먹이며 “곶감처럼 건강하게 자라라”는 축복을 전하거나, 혼례 상에 곶감을 올려 자손 번창과 부부간의 화합을 기원하기도 했다.
상주에서는 지금도 겨울철 곶감 틀을 매달아 건조하는 과정이 가족 공동 노동의 장면으로 남아 있으며, 감 껍질을 벗기는 작업은 과거 여성들이 함께 모여 ‘감 까기 마실’을 통해 음식을 준비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공동체 문화로도 이어졌다. 곶감은 또한 감기 예방, 설사 치료, 해장 효과를 가진 민간 약재로도 이용되었으며, 『동의보감』에서도 곶감을 “폐를 윤택하게 하고 기침을 멎게 하며, 위장을 안정시키고 열기를 내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대 상주 곶감 산업과 문화 자원의 계승
오늘날 상주는 전국 곶감 생산량의 약 60% 이상을 차지하는 최대 주산지로, ‘상주 곶감’은 지리적 표시제 등록을 완료한 프리미엄 건과일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상주시는 지역 농가들과 협력해 전통 곶감 건조 방식을 유지하면서도, 위생적 자동 건조와 스마트팜 기술을 도입해 고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매년 겨울 열리는 ‘상주 곶감 축제’는 단순한 지역 행사에 그치지 않고, 곶감 깎기 체험, 옛 감 매달기 재현, 곶감 음식 시식회, 진상 재현 행사 등 역사와 문화를 함께 담은 축제로 자리잡았다. 특히 고려 진상 재현은 곶감을 통한 상주의 정체성과 역사 복원 프로젝트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곶감은 와인, 초콜릿, 젤리, 고급 디저트 등 6차 산업으로 다양하게 확장되고 있으며, 최근에는 곶감차, 곶감청, 곶감푸딩 등 현대 입맛에 맞는 제품 개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상주 곶감은 이제 단지 과일이 아니라, 왕실에 올려졌던 명예, 겨울을 견딘 생명의 흔적, 지역민의 자부심, 그리고 한국인의 민속 감각이 한데 어우러진 살아 있는 전통 자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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