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에서 익은 배, 조선을 넘어 일본까지 전해진 국교의 증표
전라남도 나주는 예부터 ‘배의 고장’으로 불린다. 이곳에서 재배되는 나주 배는 크고 단단하며 당도가 높고 저장성이 뛰어나, 예로부터 진상품, 제물, 귀한 손님을 위한 과일로 사랑받아왔다. 그러나 나주 배의 가치는 단순히 지역 특산물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외교를 위한 통신사(通信使) 사행(使行)의 여정 속에서 나주 배는 실제로 일본 상인과의 교역 품목으로 활용되었고, 심지어 일본 측에서 "그 배는 하늘이 내린 선물과 같다"며 사행단이 도착하기 전부터 배를 구입해 둘 정도로, 나주 배는 조선의 외교 과일이자 환대의 상징이 되었다.
조선후기 『통신사행록』과 『일성록』 등 사료에는 실제로 통신사 일행이 휴대해 간 품목 중 나주 배가 포함되어 있었고, 대마도와 오사카에 이르기까지 배를 선물하거나 판매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나주 배는 그만큼 외국인들이 인정한 ‘조선의 대표 과일’이자, 한·일 간 문화적 교류와 신뢰의 매개체로서 기능했던 귀중한 품목이었다. 이 글에서는 나주 배가 어떻게 조선의 외교 사절단을 통해 일본에 전달되었고, 그 역사적 흐름 속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며, 오늘날까지 어떻게 문화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는지를 역사 중심으로 조명해본다.
고려~조선 시대 나주 배의 기원과 ‘왕의 과일’로서의 자리매김
나주 배의 기원은 고려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충렬왕(재위 1274~1308) 때의 문헌 『고려사』에는 “나주에서 배를 진상하니, 열매가 크고 맛이 뛰어나 궁중에서 매우 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은 나주가 이미 13세기 말부터 특정 과일 재배에 특화된 지역이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다.
조선시대에는 나주 배가 공식적으로 왕실 진상품 품목으로 지정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전라도 나주는 배가 풍성하며, 해마다 상경하여 궁중에 올린다”고 기술돼 있고, 『동국여지승람』 전라도 편에는 “나주의 대과는 과실 중 으뜸으로, 대궐에서는 이를 식후 과일로 삼는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진상용 배를 따로 선별해 표피를 닦고 줄기에 황토를 발라 보존력을 높인 방식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황토 포장 전통’의 시초로 여겨진다.
이처럼 나주 배는 단순히 지역 과일이 아닌, 왕실 식문화와 의례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명품 과일이었다.
통신사 사행과 일본 교역, 나주 배의 외교적 위상
조선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차례 일본을 공식 방문한 외교사절단이다. 사절단은 수백 명 규모로 구성되어 대마도와 오사카,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왕래했으며, 그 여정은 수개월에 달했다. 이때 사신단은 국왕의 위엄을 상징하는 예물과 함께 조선의 특산물들을 함께 휴대했는데, 그중 단연 인기 품목 중 하나가 ‘나주 배’였다.
『통신사행록』에는 “일본 측 상인들이 조선 사신에게 나주 배를 다시 살 수 없느냐고 묻더라”는 기록이 있으며, 『일성록』에도 “통신사 중 이배(梨)를 해상에서 상인들이 서로 요구하다가 다투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는 나주 배가 단순한 선물용 과일을 넘어 일본 내에서 실제로 거래되었으며, 귀한 식품으로 인식되었음을 뜻한다. 당시 일본은 자국 내 과일 품종이 한정적이었기 때문에, 당도가 높고 즙이 풍부한 조선 배에 대해 강한 관심을 가졌고, 일부 지방 영주들은 사신을 통해 배나무 묘목을 얻고자 하기도 했다.
조선은 이에 대해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 배 묘목의 무단 반출을 금지하거나, 종종 일부만 제한적으로 제공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처럼 나주 배는 단지 과일이 아닌, 외교·교역·지식재산이라는 다층적인 의미를 가진 사절품으로 조선 외교에 활용되었다.
일본 농업에 남긴 흔적과 나주 배 품종의 영향력
흥미로운 사실은, 조선에서 전해진 배가 일본에서 일부 재배 품종의 기초가 되었다는 점이다.
에도 막부 말기 농업백과사전 『농업편람(農業便覧)』에는 “조선에서 건너온 크고 단 과실은 나주시(羅州市)라 하며, 묘목은 대마도 상인을 통해 입수하였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의 ‘나시(梨)’ 품종 중 특히 신수이(新水), 호우스이(豊水) 계열이 조선 배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고 있으며, 이는 조선 배가 단지 소비 품목이 아닌 재배 기술과 유전 자원까지 영향을 끼쳤음을 시사한다.
또한 19세기 후반, 개항 이후 일본 상인들이 다시 조선 나주 지역을 방문해 배 묘목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일부 상업 보고서와 외교 문서에 남아 있어, 나주 배가 한일 농업 기술 교류의 교두보 역할까지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나주 배는 단순한 특산물이 아니라, 조선의 재배 기술·자연 조건·품종 개량 노하우가 집약된 고급 농산품으로서 국제적 영향을 미친 역사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나주 배 산업과 문화 자원의 재조명
오늘날 나주 배는 여전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품 배로 꼽히며, 나주시는 매년 ‘나주배 대축제’와 ‘배 박물관’을 통해 배의 역사적 의미와 품종의 우수성을 전하고 있다. 지금의 나주 배는 전통 품종에서 파생된 ‘신고’ ‘황금배’ ‘화산’ 등의 고당도 품종을 중심으로 재배되며, 저장 및 포장 기술이 발달하면서 명절 선물, 수출용 고급 과일, 건강식품 가공 소재로 산업화되고 있다.
또한 조선 통신사 유적과 연계한 배문화 테마 콘텐츠, 배꽃 마을 관광 상품, 배 와인·배 식초 등 6차 산업으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배 관련 교육 콘텐츠와 어린이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나주 배가 단지 과일이 아닌, 지역의 역사와 문화, 외교의 산물임을 전달하려는 시도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오늘날 우리가 먹는 나주 배 한 알 속에는 왕실에 올려지던 명예, 외국인에게 존중받은 가치, 그리고 외교의 다리를 놓은 조선 농업의 자부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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