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탈과 생존의 경계에서 절여진 바다의 맛
대한민국 서해안에는 굴비라는 독특한 염장 생선 문화가 존재한다. 굴비는 참조기를 소금에 절여 햇볕과 바람에 말려 저장한 생선으로, 단순한 조미 방식 그 이상으로, 바다와 땅, 사람과 시간이 어우러진 음식문화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굴비 하면 많은 사람들이 영광을 떠올리지만, 전라북도 군산 또한 오랜 굴비 염장 문화와 깊은 인연을 가진 지역이다. 군산은 1899년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에 서해안 수산물 수탈의 중심 항구로 기능했다. 이 시기 참조기를 비롯한 다양한 어획물이 일본으로 빠르게 반출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탈을 피해 염장 방식으로 저장해 유통하던 방식이 ‘군산 굴비’로 남게 되었다. 즉, 굴비는 단지 맛있는 반찬이 아니라, 수탈의 시대를 견뎌낸 민중의 생존 방식이자,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음식문화 유산이기도 하다.
이 글에서는 전북 군산의 굴비가 어떻게 일제강점기 수탈 구조 속에서 태어났으며, 지역 어민과 여성들의 노동, 그리고 바닷바람과 소금이 만든 음식 문화로 확장되었는지, 그리고 오늘날 향토 특산물로 계승된 과정을 역사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수탈 속에서 남겨진 물고기 – 군산항과 조기의 이야기
1899년, 군산은 조선 말기 외국과의 조약에 따라 강제 개항되었고, 이후 1910년 한일병합으로 일제의 수탈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군산항은 쌀과 어획물 수탈의 중심지로 전환되었다. 군산 앞바다는 예부터 조기의 회유로 유명한 황금어장 중 하나였다. 특히 봄철과 초여름에는 연안에 대량의 참조기가 몰려들었고, 이를 노리고 군산, 서천, 고군산군도 일대에는 수많은 작은 어촌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제는 어민들의 조업권을 박탈하거나, 어획량의 대부분을 조선총독부와 일본 어업조합을 통해 통제하며, 대부분의 참조기를 일본 본토로 실어 나르기 위한 수탈 체계를 구축했다.
『조선어업지(1917)』에 따르면 “군산에서 잡힌 참조기는 즉시 선별되어 도쿠시마와 나고야로 운송되었다”는 구절이 있으며, 이 과정에서 수탈 대상에서 제외된 소량의 조기를 어민들이 자체 저장·가공하기 위해 소금에 절이기 시작했다. 바로 이 방식이 오늘날 ‘굴비’의 시초로 간주된다. 즉, 군산 굴비는 먹기 위한 음식이기 이전에, 수탈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저장술로 시작된 것이었다.
굴비라는 방식 – 군산 여성들의 손끝에서 절여진 기억
굴비는 단순한 염장 생선이 아니다. 갓 잡은 참조기를 깨끗이 손질한 뒤, 배 속에 천일염을 가득 채워 수십 마리씩 짚끈으로 하나하나 줄에 꿰어 바닷바람이 잘 드는 곳에 매달았다. 군산의 여성들은 바람의 방향과 햇볕의 세기를 살피며 굴비가 골고루 마르도록 줄을 돌려가며 조절했다. 이 전통적인 숙성 방식은 단순히 말리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소금, 시간과 손끝의 감각이 빚어낸 정교한 작업이었다. 굴비 한 줄은 그렇게 약 45일간 소금에 절여진 뒤, 줄에 매단 채로 해풍과 햇볕을 오가며 약 12주간의 건조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이 과정은 단순한 음식 저장법이 아니라, 한 가족의 겨울 식량을 준비하고, 공동체의 생존을 지켜내는 삶의 기술이었다. 줄에 꿰어진 생선 한 마리 한 마리에는 그 해의 조업 성과, 바람의 기억, 가족의 손길이 함께 담겨 있었다.
해방 이후 군산 굴비의 변화 – 시장화와 향토식의 탄생
광복 이후에도 군산은 오랫동안 중소 어업 중심지로 기능했다. 1960~70년대 들어 고기잡이 어선이 늘어나면서 조기 어획량도 한때 증가했고, 굴비는 시장 판매용 반찬으로 서서히 전환되었다.
군산 진포시장과 군산항 근처에는 굴비 건조소, 굴비 장터, 소금 절임 작업장이 형성되었고, 특히 고군산군도 섬마을과 서천 일대까지 굴비 가공 네트워크가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산 굴비’는 서해안 굴비 중에서도 풍미가 깊고 가격이 합리적인 상품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또한 굴비는 군산의 명절 음식, 제사상, 손님 접대 음식으로 빠짐없이 등장하며, 향토음식으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특히 1980년대부터는 ‘굴비정식’이라는 메뉴가 등장하며, 굴비구이, 굴비조림, 굴비찜 등 다양한 요리로 확장되었다.
군산 굴비는 저장 음식에서 접대 음식으로, 그리고 다시 식당 문화의 메뉴로 진화한 대표적인 식문화 사례가 된 셈이다. 군산 시민들에게 굴비는 단순한 생선이 아니다. 그것은 가난한 시절을 견뎌낸 자부심이며, 서해의 바람과 바닷물, 가족의 정성이 만들어낸 음식 기억이다.
오늘날의 군산 굴비 – 수탈의 흔적을 유산으로 승화시키다
현재 군산시는 굴비의 역사와 전통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군산 굴비 브랜드 협의회’를 통해 굴비 원산지 인증, 전통 제조법 보급, 청년 창업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굴비를 단순한 반찬이 아닌 지역문화 콘텐츠로 재정의하고 있다. 또한 군산시는 굴비의 전통을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굴비 역사관’, ‘어촌 식문화 체험관’, ‘수산물 스토리텔링 전시’ 등을 준비하고 있으며, 지역 초등학교에서는 굴비 손질 체험, 굴비 요리 교육 등을 진행하고 있다.
군산 굴비는 오늘날 대량 생산된 영광 굴비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그 속에 담긴 역사적 서사와 문화적 가치는 매우 깊다. 그것은 단순한 반찬이 아니라, 한 시대의 수탈에 대한 대응 방식이자, 소금과 바람, 손끝의 정성이 만들어낸 민중의 기술 유산이다. 굴비는 물고기이자, 한 시대의 기억이고, 바다와 땅을 잇는 음식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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